설국(雪國) 울릉도[전승훈의 아트로드]
울릉도=전승훈 기자 2024. 1. 27. 14:47
울릉도에 눈이 내린다. 나리분지에 흰 눈이 수북수북 쌓인다. 도동항에도, 저동항에도, 사동항에도 눈이 가득하다. 고운 이불을 덮은 섬은 겨울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적설량을 기록하는 섬, 울릉도. 겨울에는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찾기 힘든 섬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대형 여객선인 울릉크루즈가 취항한 후 시작된 눈꽃축제가 올해 두 번째로 열리고 있다. ‘설국(雪國) 울릉도’로 겨울 여행을 떠나 보자.
●나리분지의 울릉도 고릴라(ULLA)
울릉도 눈꽃 여행의 중심지는 나리분지다. 울릉도 유일의 평원인 나리분지 전망대에 서면 나리분지를 둘러싼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나리분지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울라(ULLA) 윈터 피크닉 시즌2’가 열리고 있다. 2월 26일까지 코오롱글로텍과 울릉크루즈가 개최하는 울릉도의 대표 겨울축제다.
17m 높이의 초대형 아트벌룬으로 만든 울릉도 고릴라 캐릭터 ‘울라(ULLA)’가 서 있는 축제장에서는 캠핑과 백패킹을 즐길 수 있다. 축제장을 찾은 사람들은 네모난 플라스틱 박스에 눈을 퍼 담아 눈벽돌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눈벽돌을 쌓아서 이글루를 짓기 위해서다. 지붕까지 완벽한 이글루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텐트 주변에 웬만한 높이로 둥그렇게 눈담을 쌓기만 해도 한층 아늑해진다. 주최 측에서 텐트와 깔개 등의 기본장비를 대여해 주기 때문에 개인 침낭을 준비해 오면 눈 속 텐트에서 잠을 자는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캠프파이어에서 불멍을 하기도 하고, 눈꽃 축제장에서 스키나 눈썰매를 타는 사람도 있다. 축제장 한쪽에는 울릉도 최초의 맥조 양조장 울릉브루어리가 만든 생맥주를 시음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나리분지에서는 성인봉이나 깃대봉까지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신령수 산책길 방향으로 25분쯤 걷다 보면 삼거리에 ‘억새투막집’이 나온다. 추운 겨울, 눈 때문에 고립돼도 몇 달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진 울릉도 특유의 가옥 형태다.
집의 본채 외곽에 ‘우데기’가 둘러싸고 있는데, 본채와 바깥채 사이에 실내 베란다 같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눈이 많이 내려 고립됐을 때 집 주변을 한바퀴 돌며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본채는 통나무를 가로로 격자로 쌓아 벽을 만들어 1m가 넘는 눈이 지붕에 쌓여도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지었다.
억새투막집을 지나 메밀밭을 건너고, 출렁다리를 건너서 약 30분 동안 오르막길을 걸으면 깃대봉에 오른다. 흰 눈 속에도 빨간 울릉도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있고, 향긋한 전호나물의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산 속 나무 곳곳에는 검은색 호스가 연결돼 있다. 겨울부터 봄까지 나리분지의 유명한 우산고로쇠 수액을 받기 위해 부지런한 주민들이 설치해 놓은 장치다.
깃대봉(608m) 정상에 오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360도 풍경은 감동 그 자체였다. 바다 쪽으로는 대풍감부터 현포, 노인봉, 석봉, 공암(코끼리바위), 송곳봉, 천부가 보이고 산쪽으로는 나리분지, 알봉, 말잔등, 성인봉, 미륵산, 옥녀봉까지 울릉도의 절반 이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포인트다. 성인봉(987m)에 올랐을 때 탁트인 전망이 쉽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깃대봉 뷰는 인상적이다. 특히 바닷가에 뾰족이 튀어나온 송곳산(추산) 너머로 보이는 노을과 오징어잡이 배의 어화(漁火)도 유명하다.
●대풍감과 송곳봉(추산)
겨울 울릉도의 항구에 가면 가게 앞에 ‘육지출타중’이란 메모가 붙어 있는 집이 꽤 있다. 추운 겨울에는 배 결항이 잦고 폭설로 고립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아예 육지에 나가 사는 주민이 많다.
그런데 지난해 차량을 싣고 1200명이 탑승할 수 있는 울릉크루즈가 취항한 이후 울릉도의 겨울 분위기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울릉크루즈는 KTX 포항역에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포항 영일만에 있는 국제여객터미널에 가면 탈 수 있는데 밤 12시쯤 출발해 오전 7시쯤 도착한다. 밤새 침대에서 자고 가기 때문에 아침부터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울릉도 겨울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대풍감(待風坎)이다. 울릉도의 북서쪽 끝 태하리에 있는 ‘바람을 기다리는 절벽’이다. 울릉도와 독도에는 전라도 방언으로 된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전라도 여수 거문도 지방의 어부들이 봄에 남동풍이 불면 구로시오 해류(동한난류)를 타고 울릉도에 와서 나무를 베고,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았다.
1882년 울릉도 검찰사로 파견된 이규원은 울릉도에 조선인이 140명 살고 있었는데, 그중 11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을철에 배를 새로 만들어 대풍감에 묶어 두고,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에 하늬바람(북서풍)이 불기를 기다렸다. 돛이 휘어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면 출발해 지나온 포구에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면서 거문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대풍감에 오르려면 ‘태하향목관광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총연장 304m, 분당 50m의 속도로 움직이는 모노레일은 정상까지 약 6분이면 도착한다. 하차 후 약 500m를 걸으면 태하등대와 대풍감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는 아랫부분이 철제 구조물로 돼 있어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어마어마한 바람이 올라온다. 이 바람이면 돛단배가 충분히 육지까지 갈 만하다는 느낌이다.
전망대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주상절리 절벽으로 이뤄진 대풍감이 보인다. 절벽에 키 작은 향나무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는데, 바위 틈새에서 모진 바람을 맞으며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향나무들의 위태롭고도 절박한 아름다움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청옥빛 바닷물을 지나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울릉도의 북쪽 해안이 펼쳐진다.
학포마을과 현포, 노인봉과 송곳봉(추산), 코끼리바위(공암)가 공룡의 등뼈처럼 불쑥불쑥, 삐죽삐죽 이어지는 절경이 이어진다. 한국의 ‘10대 비경’이란 찬사를 들을 만하다.
또 다른 절경은 해변에 거대한 송곳니처럼 솟아 있는 추산이다. 송곳봉이라고 불리는데 멀리서 보면 고릴라가 바나나를 먹고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
송곳봉 옆 바위 절벽에는 구멍이 3~4개 뚫려 있는데, 밤이면 달빛이 구멍 사이로 은은하게 비친다.
그래서 송곳봉은 울릉도 고릴라 ‘울라’ 캐릭터가 탄생한 고향이다. 울라 캐릭터는 울릉도 곳곳에 숨어 있다. 낚시를 하고 있고,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모습도 있다. 울라를 찾아서 인스타그램에 띄우면 독도 가는 배가 출발하는 저동항 여행자센터인 ‘울라웰컴센터’에서 굿즈를 선물받을 수도 있다.
추산에 있는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 리조트는 천혜의 절경과 건축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김찬중 건축가가 설계한 빌라 코스모스는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양이다.
수성, 목성, 토성과 같은 태양계 행성처럼 물(水), 쇠(金), 흙(土), 불(火), 나무(木)의 기운에서 영감을 받은 공간 설계가 울릉도의 자연과 어우러진다. 정원에는 ‘메가 울라’ 상이 서 있고, 한복 디자이너 김리을의 작품도 전시돼 있다.
울릉도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볼 수 있는 ‘사태감 터널’은 햇빛에 비친 그림자가 터널 안으로 드리울 때 중세 수도원처럼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또한 울릉도의 자생 식물과 수석, 문자 조각품을 볼 수 있는 ‘예림원’도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명소다.
겨울의 별미=독도새우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 인근 바다의 수심 300m 이하 바위 틈에서 살고 있는 새우다. 도화새우, 꽃새우, 닭새우 등 3종류의 새우를 합쳐서 독도새우라고 부른다. 투명한 살의 싱싱하고 쫄깃한 맛이 소주를 부른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당시 메뉴에 올라 유명해졌다. 도동항의 천금수산은 독도새우를 잡는 배를 직접 운영한다. 사장님은 “수심 300m 이하 심해에서 통발로 잡는데, 1년 통발 값만 1억5000만 원이 든다”며 독도새우가 비싼 이유를 설명한다.
울릉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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