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현금을 숭상하는가? (下) [최정봉의 일본 관광객이 묻는다]

2024. 1. 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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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그리고 헤어질 결심

뭐니 뭐니 해도 해외여행의 첫 관문은 환전이다. 현지 화폐를 쥐는 순간 다가오는 이국의 정취는 특별하다. 항공권 구매 때와는 또 다른 기분. 아쉽게도 디지털 지불수단의 진화는 해외여행의 ‘생물감’을 떨어뜨린다.

아날로그 왕국인 일본 여행도 사정이 많이 변했다. 방문 빈도와 함께 ‘관광지능’이 높아지면서 수이카(Suica), 파스모(Pasmo), 니모카, 이코카 등 현지 IC카드가 현금 대용으로 부상했다. 원래 지역 대중교통 카드였지만 점차 광역화, 다변화되어 편의점이나 여타 소매업체에서 직불카드처럼 사용할 수 있다.

하나은행의 트래블로그나 비자의 트래블월렛도 인기가 높다. 사전 충전의 간편함에 더해 환전우대, ATM 인출 수수료 면제라는 장점이 부각됐다. 최근 토스뱅크는 평생 환전수수료(17개 통화), 해외결제, 출금 수수료 모두 제로, 거기에 자동충전 기능까지 겸한 상품을 출시했다.
반면 신용카드는 외면당하는 추세다. 한국보다 높은 결제료에 해외사용 수수료까지 부가되는 흠이 있다. 젊은층이 선호하는 QR/바코드 결제 역시 의외로 만만치 않다. 카카오페이나 네이버페이 배너는 잘 눈에 띄지 않는 데다 한국처럼 일본의 애플페이나 구글페이 오프라인 결제는 제한적이다.

아래 <사진1>을 보자. 점포 입구마다 난삽하게 붙어 있는 지불수단 스티커들. 웬만하면 모두 받아줄 것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현실은 다르다. PayPay(카카오페이와 제휴), Line Pay(네이버페이와 제휴), Ali Pay, R Pay 등 일본의 결제 코드들은 대다수가 우리 금융시스템과 연결되지 않는다.

모두 받아준다면 애초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차린 건 많지만 먹을 건 없는 엉성한 뷔페처럼 일본의 디지털 지불수단은 풍요 속 빈곤, 외화내빈의 정수를 보여준다. 도대체 일본의 비현금결제는 어느 수준까지 온 것인가?

점포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비현금 결제 수단 스티커들 / 아시히신문



 

 한국 94% vs 일본 36%

2022년 무현금결제액이 111조 엔을 넘어섰다는 통계가 발표되자 일본 재무성은 매우 고무된 분위기였다. 95조 엔의 전년 대비 무려 17%나 증가해 사상 처음으로 100조 엔 고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2025년 목표치인 40%를 무난히 달성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일본 정부가 무현금사회에 매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화폐관리의 천문학적 비용 절감과 시중유통 자금의 투명성 제고를 꼽을 수 있다. 물론 증세 효과도 은근히 기대한다. 또 고령화와 노동인력 감소에 대처하는 노동생산성 향상도 주요 관심사다.

사회적 혜택도 분명하다. 상인들의 경우 신속 결제와 소비 회전율 제고로 매출 향상이 가능하고, 은행은 막대한 현금창구 인력과 전국단위 ATM기기 축소라는 메리트를 누린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분실, 절도, 위폐로 인한 사고위험이 줄고 공중위생 개선이라는 부가 혜택도 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일본의 무현금결제는 전체 소비지출 대비 36%에 그친다. 10년 전 불과 15%였던 것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하겠지만 2020년 이미 94%를 넘어선 한국이나 중국의 83%와는 격차가 크다. 36%라면 디지털금융 ‘개도국’이라는 꼬리표를 떼기도 버겁지 않을까.

세부내역을 들여다보면 좀 더 비관적이다. 아래 <표1>처럼 총 111조 엔 결제액의 85%에 해당하는 93조8000억 엔이 신용카드 사용에 쏠렸다. 뒤이어 QR/바코드 결제가 7조9000억 엔, 전자화폐(e-money) 결제가 6조1000억 엔, 직불카드 결제가 3조2000억 엔을 기록했다. 신용카드를 제외한 나머지 지불방식의 합이 전체의 15%에 불과하다.

단, 증가율로만 치자면 QR코드 결제가 전년 대비 50%로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 그 뒤로 직불카드가 19%, 신용카드 사용액이 16%, 마지막으로 전자화폐(e-money) 결제가 2%로 나타났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QR 결제가 처음으로 전자화폐 사용액을 넘어섰고 신용카드에 이어 비현금결제의 중심축으로 도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재무성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무현금결제의 1등 공신은 코로나19 확산이었다. 팬데믹 기간 중 동전과 지폐가 병균 매개체라는 공포가 번졌고 2020~2022년 사이 비접촉결제가 폭증했다. 그 결과 2023년 12월까지 유통 동전수가 23개월 연속 급감했다. 최고 액면가 500엔 동전의 감소량이 가장 두드러졌다.
현금과의 결별을 고심해 온 일본 관료들에게 팬데믹은 천우신조였다. 경제산업성은 2019년 10월부터 8개월간 전국 단위의 무현금거래 캠페인을 주도했다. 무려 200만 매장이 참여한 이 행사에 라쿠텐, 아마존, 야후재팬 등 거대 온라인 쇼핑몰과 오프라인 편의점 체인이 중심을 잡았다.

대외적으로는 코로나19로 침체된 경기 활성화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상 정부의 관심은 온통 무현금경제 가속화에 쏠려 있었다. 참여 소상공인들에게 결제장비 설치 보조금을 지급했고, 소비자들에겐 2800억 엔 예산을 풀어 거래당 2~5%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큰 장이 서자 신용카드와 빅테크 기업들은 지불 가맹점과 신규 고객 확보에 나섰고 정부보다 후한 리베이트와 바우처로 판을 키웠다. 덕분에 당시 소비자들은 얼떨결에 10%에서 최대 30%의 할인 혜택을 누렸다.

그림은 달랐다. 3000만 외국 관광객이 예상된 2020 도쿄 올림픽을 무현금사회의 전환점으로 삼을 공산이었다. 불행히도 글로벌 셧다운으로 길이 막혔고 무관중 올림픽을 택한 일본 정부는 우회로와 함께 다른 강력한 돌파구가 절실했다.

다행히 8개월간의 캠페인은 비현금결제를 본 괘도에 올려 놓았다. 2022년 일본 슈퍼마켓협회 백서에 따르면 업계 90% 이상이 신용결제 장비를 갖추었고 77%는 QR코드나 전자화폐 지불시스템을 구비하게 되었다. 2023년 한 소비자 설문도 당시 첫 무현금결제 구매를 시작한 소비자의 86%가 동일 결제수단을 활용한다는 데이터를 내놨다.

후생노동성도 가세했다. 2023년 4월부터 개인 디지털지갑으로 근로급여를 지급하는 제도를 전격 시행한 것이다. 일인당 최대 100만 엔까지 전자화폐를 지불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무현금 정책자금을 집행하는 것과 진배없다. 현금과 ‘헤어질 결심’을 한 정부의 진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팬데믹 기간 무현금결제 할인 캠페인 사인 (사진: 아메바블로그)


 

 쉬운 이별이란 없다

그러나 아직 마음 놓기는 이르다. 일본 슈퍼마켓연합 유키오 가와노 회장은 팬데믹 캠페인 중 무현금결제를 신청하지 않은 업소가 절반에 이르고, 보조금을 받고 참여했던 업체 다수도 실상 현금수령을 고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음식점을 비롯한 많은 중소상인들이 무현금결제의 이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전한다. 원활한 캐시플로가 생명인 소매업에서 미수금과 다를 바 없는 디지털결제는 크게 환영받기 어렵다. 현금을 건네는 고객이 넘쳐나는데 굳이 모바일 결제기를 들이밀 필요가 있겠나.

현금 ‘애호 세대’인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3분의 1을 차지하는 일본에서 모바일, QR 등 디지털 지불수단의 급팽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앱 다운로드, 설정, 핀코드 입력까지 거쳐야 할 관문들에 대한 그들의 저항감은 강하다. 휴대폰 분실에 대한 우려는 말할 것도 없다.

앞서 지적한 비현금지출의 신용카드 편중도 거북하다. 2023년 기준 총 발급카드 수는 약 3억1000만 장, 성인 일인당 평균 3장을 보유하는 꼴이다. 지난 10년간 거래액이 2배 이상 증가해 연간 약 75조 엔 지출을 기록했지만 고령층의 카드 소유율이 유난히 높다는 점이 걸린다. 확장성의 한계가 예측되기 때문이다.

‘만약용’으로 발급받은 그들의 카드는 장롱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출의 82%를 여전히 현금에 의존한다는 2022년 스태티스타(Statista)의 설문 결과가 이 추측을 뒷받침한다. 응답자 38%가 무현금결제의 경우 정확한 지출 규모 확인이 어려워 과소비 위험이 높다고 답했고, 55%는 계좌나 개인정보 악용을 우려했다.

이런 공포가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 일본 소비자신용협회는 2022년 신용카드 부정 사용과 사기피해액이 총 436억 엔으로 전년 330억 엔 대비 약 30%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카드번호 무단사용이 90% 이상이었고, 위장 웹사이트 피싱 사기도 크게 늘었다.

이에 더해 디지털 보안에 대한 낮은 사회적 신뢰도 무현금사회 순항을 낙관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이다. 빈번한 자연재해와 그로 인한 전력, 전산, 컴퓨터 시스템 마비를 고려하면 일본인의 보수적 태도가 십분 이해된다. 뚜렷한 현금 사용 감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현금 발행량은 명목 GDP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는 현실, 다시 한번 직시할 필요가 있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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