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악마화'하는 회계 공시, 민주노총은 왜 응했을까?
윤석열 정부의 노조탄압은 노골적이고 전방위적이다. 정부가 민주노총에 '불법'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시도 중 하나가 회계공시다. 민주노총은 조합원의 대중조직으로서 모든 내역을 공개할 뿐 아니라 10원 하나도 유용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그럼에도 회계공시를 들이밀며, 국가권력이 노조의 운영과 조합원 명단까지 볼 수 있는 회계공시를 할 수 있도록 노조법과 소득세법 시행령을 개악했다. 명백한 결사의 권리, 자주성 침해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2023년 10월 수용 의사를 밝혔다. 이에 비정규직운동 연대체인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잘못된 결정을 다시 바로잡기 바라며 현장의 목소리를 제언한다.
'해 본 놈이 더 한다', '아는 놈이 더 한다'는 말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노동조합에 대한 회계 공시 강요는 윤석열 정권의 반동화 흐름에 더불어, 노조 경력을 활용해 장관이 되어 정권에 편승·부역한 출세주의자 이 장관의 합작품이라 생각한다.
회계 공시 강요는 노동조합들의 조합주의 확산, 노조 간의 갈등과 경쟁 구조,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유, 노조를 악마화하는 언론, 윤 정부가 계속해온 시행령 정치 등을 모두 동원한 '꼼수공격'이다. 이런 꼼수에도 불구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회계 공시에 응했다. 다만 다른 것은 둘째 치고 민주노총이 회계 공시에 응했다는 점에서 정말 많이 놀랐고, 분노했다.
조합원들에게 이를 어찌 설명해야 되나 난감하고 창피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회계 공시에 대한 현장의 입장을 논의하라고 했을 때, 우리 톨게이트지부는 단호히 '거부'로 입장을 정리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속한 민주연합노조는 회계 공시 강요에 응하지 않았다. 논의 초창기에 현장에서 분명한 거부 입장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이 당연히 거부할 것이란 믿음도 상당히 작용했다.
주변의 활동가, 현장 대표들을 만나 보아도 회계 공시는 노조 탄압이며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90%가 넘는 사업장, 노조에서 회계 공시에 응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최상급 의결 단위에서 결정한 사항이기에 거부할 명분이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상급 의결단위에서 총파업을 결정하면 90% 이상이 동참하는 기풍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의 이해라도 되겠다.
'실리를 찾을 것은 찾고 투쟁하면 되지 않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독약을 탄 실리를 먹으면 조직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죽게 된다. 톨게이트 직접고용 쟁취 투쟁 당시 문재인 정부, 민주당, 한국도로공사 측은 기를 쓰고 노동자들을 자회사로 보내려 했다. 임금을 30% 이상 더 올려준다는 제안도 있었다. 그때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실리를 찾고 투쟁은 투쟁대로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이다.
당시, 치열한 논쟁 끝에 우린 거부했다. 정치권력과 사용자가 그런 실리를 호의로 제시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후 우린 직접고용을 쟁취했고 더 중요하게는 민주노조의 자긍심, 도로공사 반백년의 역사에 민주노총 깃발을 꽂았다는 자부심,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 투쟁,조직이 너무도 필요하다는 절박성을 우리 가슴에 쟁취했다.
회계 공시에 응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실리가 뭐가 있는가? 조합비 기부금 처리에 따른 15%의 세액공제가 전부다. 그렇다면 진정 이것은 노동자계급답고 원칙적 대응으로 오는 자긍심이 있는 실리인가? 굴복과 굴종에 따른 현상 유지인가? 명확히 굴복과 굴종에 따른 현상 유지 아닌가!
‘만약에 있을 수도 있는 조합원들의 불이익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는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불이익을 책임질 것은 노조가 아니다. 상급 단체가 아니다. 만약에 있을 수도 있는 불이익의 책임자는 윤석열 정권이다. 이를 설계하고 부역하고 있는 고용노동부다. 노동조합의 책임은 권리와 혜택을 강탈해 가려는 실질적 책임자를 끝장내는 투쟁에 조합원들을 주인으로 세워주는 것이다.
민주노총 회계공시 수락의 의미, 조합주의
민주노총의 회계 공시 수락 결정은 민주노조 운동의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창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계급 관점은 무뎌지고, 현장에 안주하며 실리만 찾는 조합주의가 커진 결과라 생각한다. 그리고 민주적 토론과 운영의 원리도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 거 같지 않다. 민주노총이 심각히 우경화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들 한다.
회계 공시 문제만이 아니라 민주노총, 민주노조는 관점과 자세를 바꾸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없으면 안 된다. 계속 이러면 3백만, 4백만으로 조합원 수가 늘어난다고 해도 불행한 노동에서 우리는 벗어나기 어렵지 않겠는가. 계속 이렇게 대응한다면 노동자, 민중에게 희망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 후대의 미래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을 결정했고, 노동개악 분쇄 투쟁을 결의했다. 그렇다면 회계 공시 강요에 대해서도 노동계급적 관점에 따라 원칙적 결정을 하고, 이에 따른 혼란과 갈등이 발생한다면 지도부가 설득하고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투쟁으로 극복, 돌파해야 하지 않을까? 조합원을 믿고 설득하고, 토론할 의지, 자신감이 없는 것은 아닌지, 심각히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이제라도 민주노총은 공식 결정 단위에서 회계 공시 거부를 선언하길 바란다. 산별연맹 단위에서도 결의했으면 한다. 책임을 아래로 내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회계 공시 관련 법 개정 투쟁과 함께 전체 노동자의 최저임금‧실질임금 인상 쟁취를 위한 투쟁에도 열과 성을 다하자. 이런 유치하고도 천박한, 잔인하고도 비열한 꼼수 공격을 자행하는 윤석열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투쟁으로 모두가 일어서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이고 정치권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널리 알려지고, 우리 스스로도 성장했으면 좋겠다.
[박순향 민주일반연맹 전국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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