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서정시 같았던 임윤찬의 '황제'…장대한 여정을 예고한 츠베덴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사운드 확 달라진 '츠베덴호 서울시향'…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거듭나나
임윤찬 팬 "임윤찬, 클래식에 빠지게 한 사람…국내외 공연 모두 챙긴다"
클래식 애호가 "서울시향, '귀한 아름다움' 느끼게 해…전체 패키지 결제"
검은색의 연미복을 입고 하얀 나비 넥타이를 맨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무대 중앙으로 입장하자, 연주를 시작하기 전부터 일부 기립 박수와 함께 "브라보" 소리가 들려 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얍 판 츠베덴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것을 기념하는 뜻깊은 연주회에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자리를 빛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제(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 클래식 애호가와 클래식 초심자가 함께 모였습니다.
티켓 오픈 45초 만에 전석이 매진된 연주회의 티켓을 구하고 모인 관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요. 임윤찬은 폭풍 같은 질주 대신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세련되게 정제된 연주를 들려주었고, 츠베덴은 유연한 지휘로 서울시향의 화려한 시작을 예고했습니다.
이날 공연장에는 츠베덴 음악감독의 취임 연주회를 축하하기 위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 등이 자리했습니다.
임윤찬과 서울시향의 그제(25일) 연주를 리뷰하고, 관객들의 소감을 전합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에 작곡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통상적으로 1악장과 3악장에서 충만한 열기와 긴장감을 중간중간에 크게 드러내주는 곡입니다.
시작부터 박진감이 넘치는 제1주제와 스타카토 리듬 등이 트레이드마크인 곡이지만, 반대로 임윤찬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조용하게 연주를 하면서 그 안에서 강약을 들려주는 연주 방식을 택했습니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 현악기의 소리도 시작부터 약했습니다.
악상이 산들바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연주를 하는 임윤찬도 그러했는지 연주할 때 잠시 노는 왼손을 공중에서 흔들면서 곡의 리듬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윤찬의 연주는 평소의 격정적인 연주가 아닌 섬세하고 유연한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아티큘레이션을 구사했지만, 큰 소리의 강한 타건은 비교적 보여주지 않았는데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짐머만 버젼의 '황제' 연주와 그러한 점에서 달랐습니다.
대신 카덴자에 상당하는 독주 부분에서 디미누엔도(점점 여리게)를 효과적으로 표현했고, 부드럽게 물방울이 굴러가는 듯이 유연한 피아노 연주를 했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이지만, 마치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물의 유희'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전반적으로 매우 작았기 때문에 관객의 집중도가 커졌습니다. 객석에서 기침을 하는 것이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해도 피아노 소리뿐 아니라 현악기의 소리까지 모두 묻힐 정도로 1악장 내내 조용한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황홀함이 커진 것은 2악장 때부터입니다. 2악장 도입부에서 서울시향의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는 굉장히 아름답고 풍성한 소리를 냈습니다. 점차 커지는 아름다운 현의 소리에 바로 몰입한 임윤찬이 어루만지듯이 피아노 건반을 쳤습니다.
그렇게 2악장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임윤찬은 건반의 소리를 크게 내며 분위기를 직접 주도했고,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를 쉬는 동안 화답하듯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고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는 등 음악에 빠져든 모습을 보였습니다.
강렬하게 시작하는 3악장에선 임윤찬의 강한 소리를 제대로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피아노 소리에 영감을 받은 듯이 바로 이어진 오케스트라의 현의 소리가 피아노의 박자를 따라갈 뿐 기대만큼 큰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브라스 소리도 약하게 따라 왔습니다.
'음악감독 취임 연주회'이지만, 사실 지휘자 츠베덴은 오케스트라를 향해 내내 큰 몸짓을 보이지 않았고 작은 소리로 임윤찬의 연주 스타일을 따라가 주었는데요. 임윤찬을 배려한 연주라 현과 브라스의 소리가 약했고 베토벤 특유의 웅장한 활의 느낌이 없었습니다.
MBN 취재에 서울시향 관계자는 "임윤찬 씨와 첫 리허설을 한 순간부터 츠베덴 감독은 연주자가 협주곡에서 더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공연을 지휘했다"고 전했습니다.
임윤찬의 연주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그의 흥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수차례 '황제'를 연주한 임윤찬은 이번 연주에서 3악장에서도 폭풍같은 숨가쁜 질주를 자랑하기보다 춤곡풍의 기세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공연 내내 보여준 조용한 서정성을 유지했는데요.
그렇지만 흥을 감추지 못하고 피아노 의자 위에 앉은 자신의 몸을 내맡기 듯이 좌우로 춤추듯이 움직였고, 춤곡인 이 음악 자체를 신나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줬습니다.
피아노의 높은 음의 소리가 특히 맑고 예쁘게 나오도록 연주했고 트릴을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잘 표현한 임윤찬의 연주가 끝난 뒤 츠베덴은 임윤찬을 대견하게 바라보았고, 임윤찬은 객석의 호응에 앵콜곡으로 '정결한 여신'을 연주했습니다.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의 작품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란 곡을 쇼팽의 피아노 버젼으로 편곡한 것을 연주한 것인데, 성악가의 음성이 노래를 부르면서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을 듣는 듯이 세심하게 조율해 한음 한음 치는 피아노 소리로 공연장이 가득찼습니다.
서울시향의 진가는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에서 드러났습니다. 1부 공연에서 격정적인 큰 지휘 몸짓을 아껴 두었던 츠베덴이 2부에서는 카리스마 있게 단원들을 이끌었습니다.
1악장에서 목관악기로 연주한 음정과 길이는 숲속을 산책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뻐꾸기의 소리인 것 마냥 완전히 똑같이 들렸습니다.
연주 무대의 오른쪽 문을 열어두어 시원하게 뻗는 트럼펫 소리가 바깥쪽에서 들려오게끔 했다가 그곳에 서있던 트럼펫 연주자 4인방이 연주 도중 줄지어 들어와 자리에 착석하도록 한 모습은 유쾌함을 자아냈고 마치 극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휘자 츠베덴의 인상적인 '발짓'입니다. 츠베덴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듯이 허리를 돌리고 발을 여기저기 움직였고 무릎 관절도 사용했는데요. 만일 지휘자의 연단에 발자국이 검게 찍힌다면 연단의 사방이 시꺼매질 정도였습니다.
음악의 흥을 돋는 츠베덴의 춤같은 지휘는 영국 태생의 세계적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것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2악장에서는 시골 서민의 춤인 '렌틀러' 음의 흥겨움을 더해주었습니다.
유명한 동요 '마르틴 형제' (프랑스어로는 Frère Jacques)를 단조로 바꿔 장송 행진곡이 연상되도록 패러디성으로 연주한 3악장에서는 작곡가 말러가 의도한 대로 '카바레 풍', 우리 느낌으로 말하자면 기묘한 트로트 풍이 제대로 느껴졌습니다.
바순과 오보에 등의 연주로 이어지다가 플룻과 팀파니가 함께 기묘하게 연출하는 '쿵짝쿵짝' 느낌을 현악기가 따라가는데요. 3악장의 후반부에서도 목관악기의 연주가 이어지다가 트롬본, 튜바 등이 다같이 그 오묘한 음을 완성하는 절묘함을 보였습니다.
당대의 '카바레 풍' 선율은 평론가와 청중을 분노케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러의 교향곡 1번은 다수의 클래식 애청자들이 크게 선호하는 곡입니다. 그리고 그 오묘한 곡의 분위기를 '츠베덴호' 서울시향이 그대로 살렸습니다.
서울시향이 3악장에서 바로 이어간 4악장에서는 말 그대로 '거인의 진격'이 이뤄졌습니다. 현의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금관이 깔끔하게 웅장한 소리를 뿜어 냈습니다.
금관악기의 폭풍 같은 음량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 곡은 호른과 트럼펫 주자들이 일어서서 연주하도록 돼있는데, 서울시향도 이 극적인 연출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1번의 지휘가 끝난 뒤 객석에서 1부 때보다 더 격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1부에서 1층 객석의 20~30여 명이 기립박수를 쳤다면 2부가 끝나고는 3분의 1 이상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2층과 3층의 기립박수도 쏟아졌습니다.
서울시향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와 같은 소리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부에서 들을 수 없던 강한 브라스 소리가 들렸고 바이올린의 소리도 4악장에서 풍성하게 완전히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큰북과 탐탐의 소리도 자연스러웠고 상당히 좋았습니다.
끊이지 않는 환호에 일어난 츠베덴은 단원들을 차례로 일으켰습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 목관악기 연주자, 큰북과 팀파니 등 타악기 연주자, 트럼펫과 호른 등 금관악기의 연주자, 바이올린 수석연주자 등을 모두 소개하며 자신의 공을 돌렸습니다.
인기로 볼 때 '클래식계의 아이돌'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임윤찬의 팬인 중년의 여성 그룹은 MBN 취재기자를 만나 "친구와 가족을 모두 동원해야 임윤찬의 공연은 예매에 성공한다"며 "모든 공연을 챙겨 보고 있다"며 임윤찬의 연주에 감격을 표했습니다.
이들은 "임윤찬의 공연을 보러 유럽도 가고 일본도 갔다왔다"며 올해 해외 공연들도 보러갈 것이라 말했습니다. 해외의 공연장은 자리를 잡기 쉽고, 티켓값도 국내보다 싼데다가 홀이 작아 소리가 더 잘 들리는 반면, 국내는 그렇지 않아 아쉽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다른 임윤찬의 팬인 20대 관객은 "임윤찬은 제가 클래식에 빠지게 한 사람"이라며 "피아노 협주곡 '황제'의 새로운 부분이 많이 들렸고 현장감이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임윤찬의 공연을 본 횟수에 대해선 "셀 수 없이 많아 기억이 안 난다"고 전했습니다.
남성 관객 김진 씨는 임윤찬을 향해 "피아노를 (치는 직업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쳤던 사람으로서 보면 보통이 아닌것 같다"며 "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보니 몇십년 만에 한번씩 나오는 피아니스트 같고 기회가 있으면 또 보고싶다"고 말했습니다.
클래식 애호가인 30대 여성은 서울시향의 재발견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객은 "원래 말러를 들으면 머리를 쥐어 뜯는데 호불호를 떠나 '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며 "이런 곡을 하기 위해서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서울시향의 전체 패키지를 구입한 이 애호가는 과거에 아쉬웠던 서울시향의 금관악기 소리도 분명해서 좋았다고 말하며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서울시향의 미래를 점쳤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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