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의 ‘파벌 해체’에 저항하는 아소와 모테기
총리가 해체 선언하고 국민이 지지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
(시사저널=임수택 객원편집위원(도쿄경영단기대학 객원교수))
1월17일 도토리 미쓰코가 일본항공(JAL) 사장에 취임했다. 일본에서 여성으로 처음이지만, 객실승무원 출신의 사장 취임도 사상 처음이다. 역시 여성인 요시노 도모코는 2021년 10월 일본 노조(일본 노동조합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래 일본 노동계를 이끌어오고 있다. 1989년 노조 설립 이후 여성 회장은 그가 처음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1월22일 플로피 디스크나 CD-ROM 사용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일본 사회가 조금씩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치만이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일본 국민의 볼멘소리는 커지고 있다.
파벌로부터 공천과 선거자금 지원받아
그런데 이 무풍지대에도 최근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도쿄지검 특수부가 자민당 국회의원들이 정치자금 조성 목적의 파티권 판매 수입의 초과분을 환수받고 이를 정치자금 수지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채 유용한 비리를 전방위로 조사하고 있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아베파뿐만 아니라 니카이파, 기시다 총리가 소속한 기시다파 등이 수사 대상이다.
자민당, 특히 아베파가 위기에 직면했다. 아베파 소속 의원은 96명으로 당내 최대 파벌이다. 이어 아소파(56명), 모테기파(53명), 기시다파(46명), 니카이파(38명), 모리야마파(8명) 순이고, 무당파는 80명이다. 이번 정치자금 스캔들도 아베파 소속 의원이 가장 많고 위법한 자금 규모도 가장 크다. 아베파는 현 정부에서 2인자인 관방장관을 비롯해 여러 부처의 장관 등 상당 지분을 차지해 왔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기시다 총리는 당정 운영 시 아베파 및 아소파 등과 협의하고 협조를 받고 있는데, 정치자금 스캔들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피살된 후 아베파는 좌장 없이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결집력이 다소 약해진 상황에서 이번 정치자금 스캔들로 국민의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파벌 해체를 선언했다.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아베파의 해체 선언 직전에 기시다 총리가 1월18일 서둘러 기시다파 해체를 발표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니카이파도 해체를 선언했다. 당내 6대 파벌 중 3대 파벌이 해체를 선언했고, 모리야마파도 해체를 검토 중이다. 문제는 아베 전 총리 사망 이후 현재 자민당 내 영향력이 가장 큰 아소파의 향배다.
기시다 총리가 기시다파 해체를 발표하자 아소 부총재는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파벌은 정치자금과 관계가 없는데도 당내 중차대한 일을 자신과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서둘러 아소 부총재를 만나 사과의 말을 전했다. 불만을 토로하기는 모테기 간사장도 마찬가지다.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한 이후 자민당은 사실상 기시다·아소·모테기 삼두체제로 운영돼 오고 있다. 당정의 핵심 사안은 이들에 의해 먼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자민당 정치는 철저한 파벌정치 체제다. 1955년 보수연합으로 자민당이 결성된 이듬해 8개 사단으로 불린 8개의 파벌이 만들어졌다가 1960~70년대를 거치며 후쿠다파(현 아베파)·다나카파(현 모테기파)·오히라파(현 기시다파)·나카소네파(현 니카이파)·미키파(현 아소파) 등 5대 파벌로 정리되었다. 이 파벌 체제가 조금씩 변화를 거치며 지난 70여 년간 일본 정권을 유지해 오고 있다. 파벌정치는 2세·3세들의 세습정치와 함께 자민당 정치의 특징이다. 파벌 존립의 표면적 이유는 신진 의원들을 교육시키고 정보를 공유하고 연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70여 년간 파벌정치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거자금 지원, 공천, 각료 및 당내 주요 직책 추천 등이다.
파벌에 속하면 파벌의 장으로부터 공천과 돈을 지원받고 각료로도 추천받을 수 있다. 파벌 소속 의원이 많을수록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는 파티를 많이 열 수 있다. 특히 자파 의원이 장관이 되면 그를 이용해 더 많은 정치자금을 조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에 자파 세력 확대에 심혈을 기울인다. 아베파·아소파·모테기파에 둘러싸인 기시다 총리는 이번 정치자금 스캔들을 계기로 파벌 구조를 깨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공분하고 있는 국민 여론을 명분으로 정치 개혁을 위한 '정치쇄신본부'를 만들었다. 목적은 파벌정치의 폐해를 알리고 궁극적으로는 파벌을 해체하는 것이다.
파벌, '정책집단'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존속
정치쇄신본부는 1월23일 세 가지 계획을 발표됐다. 첫째는 정치자금 조성 목적인 파티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 파벌에서 각료 및 당 요직 추천권을 폐지하는 것이다. 셋째는 여름과 겨울에 계파 의원들에게 주는 '떡값'과 '얼음값'의 폐지다. 파벌이 존속할 수 있는 자금원을 차단하고 각료와 당 주요직을 추천하는 인사권을 금지함으로써 파벌정치의 폐해를 막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파벌의 완전한 해체가 아니라 '정책집단'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사실상 존속하기로 해 여전히 일본 국민은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기시다 총리로서도 아소파와 모테기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이었던 셈이다.
존속을 결정한 아소파와 모테기파는 돈과 인사권이 없는 상태에서 파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과거의 한 사례가 대신 말해 준다. 1988년 정치인과 관료 등이 관련된 전후 최대 정치자금 수뢰 스캔들인 '리크루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자민당은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선언하고 이듬해 '자민당 정치 개혁 대강'을 발표했다. 골자는 자민당 총재, 부총재, 간사장,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 참의원 의장, 각료는 재임 중 파벌에서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고 있다. 70년이 지나도 자민당 파벌의 역할과 금권정치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일본 총리는 자민당 내에서 총재로 선출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당내 국회의원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래서 파벌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오는 4월 보궐선거, 7월 도쿄도지사 선거, 9월 총재 선거까지 정국 향방의 풍향계가 될 변수들이 이어진다. 현재 기시다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20%대 중반에 머물러 있다. 여론은 악화일로지만 기시다 총리가 스스로 하야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기시다 총리는 그간 아베파와 아소파에 눌려있던 당내 환경에서 파벌의 연대가 느슨한 틈을 이용해 당을 좀 더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노리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실질적인 당내 최대 파벌인 아소 부총재와 모테기 간사장의 선택이다.
이번 파벌 해체 발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기시다 총리에게 섭섭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자금과 인사권 관여를 금지하는 조건으로 파벌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아소파와 모테기파는 '정책집단'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파벌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두 파벌의 좌장인 아소와 모테기는 9월 총재 선거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파벌의 연대를 더 강화하고 상호 협력을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벌 문제로 자민당의 파벌 체제가 더 공고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이유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파벌 해체에 찬성하고 있지만, 자민당의 정치문화가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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