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저런 걸 좋아해" 멸시 받던 오타쿠, 큰손 됐다…빛 받는 서브컬처

최우영 기자 2024. 1. 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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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마켓]
국내서 음지 문화로 여겨지던 서브컬처 장르 대중화 되면서 각종 게임 개발
서브컬처 이용자들 지갑 열면서 매출효과 느낀 게임사들의 구애 이어져
서브컬처 본토 일본에 역수출하는 등 '오타쿠 애국'까지 실현
[편집자주] 남녀노소 즐기는 게임, 이를 지탱하는 국내외 시장환경과 뒷이야기들을 다룹니다

14년 전 tvN의 프로그램 '화성인바이러스'에 충격적인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페이트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와 사랑에 빠졌다며 미소녀 캐릭터가 그려진 쿠션을 '여자친구'라 불렀다.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 빠진 이들을 일컫는 '오타쿠'의 전형이었다. 누리꾼들은 오타쿠를 '오덕후'로 부르고는 했는데, 몰입도가 높은 오덕후에 대해선 '오덕에 오덕을 더했다'며 '십덕후'로 부르며 멸시했다.

일본에서도 오타쿠 문화는 주류문화에 대비되는 개념의 '서브컬처(하위문화)'로 불렸다. 미소녀 캐릭터 티셔츠를 입은 이들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시선이 이어졌고, 온라인에서도 '안여돼(안경여드름돼지)' '안여멸(안경여드름멸치)' 등으로 오타쿠들의 외모를 비하하는 흐름이 강했다. 그런데 이렇게 소외 받던 오타쿠들이 당당하게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브컬처에 대한 사랑을 아낌 없이 드러냈고, 관련 상품을 구매하는 데 지갑을 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오타쿠들을 보며 많은 게임사들은 사업 기회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멸시 받던 오타쿠 문화, 대세가 됐다
쿠션 속 미소녀 캐릭터와 연애하는 콘셉트로 충격을 줬던 오덕페이트. /사진=tvN 화성인바이러스 캡처
과거에도 오타쿠들이 즐기는 게임들은 적지 않았다. 가장 많은 장르는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나 '미육시(미소녀 욕성 시뮬레이션)' 등이었다. 주로 패키지 게임으로 발매됐고, 오타쿠들은 싱글플레이를 즐기면서 게임 커뮤니티 등에서 정보를 교류하는 수준이었다.

국내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나 FPS(1인칭 슈팅게임), 스포츠 게임 유저들은 미연시와 같은 서브컬처 게임들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게 다반사였다. 중고교 시절 서브컬처 문화를 즐기는 동급생들은 놀림을 받거나 심한 경우 'X덕' 소리를 들으며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최근에는 서브컬처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 달라졌다. 많은 누리꾼들은 이 배경을 온라인 커뮤니티 활성화 등으로 본다. 루리웹 등의 커뮤니티를 통한 정보 교환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의식을 공유한 것이다. 현실에선 남들에게 내세우기 어려웠던 오타쿠 취향을 온라인에서 인정 받으면서 '오타쿠 인증'도 이어졌다. '의외(?)'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이 "나도 오타쿠"라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는 또다른 오타쿠들의 커밍아웃과 공개 활동으로 이어졌다.

혼자 즐기던 오타쿠 게임, 연결성이 더해지며 날개 달았다
미육시 게임의 고전 명작 '프린세스메이커2'. /사진=가이낙스
서브컬처 게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타쿠들의 커밍아웃이 이어지면서 '사업성'을 발견한 게임사들은 이들이 싱글플레이가 아닌, 서로 연결돼 교류하며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레이형 게임을 연이어 출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PC방이 아닌, 스마트폰 환경에서 조용히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이 출시되면서 이 같은 게임들은 날개를 달았다.

처음엔 일본에서 먼저 출시된 게임을 국내에서 유통하는 식으로 시장을 만들었다. 국내 서브컬처 3대장으로 불리는 게임 중 넷마블의 '페이트: 그랜드오더'와 카카오게임즈의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가 이 같은 케이스다. 이 두 게임은 폭발적인 매출을 일으키며 일본 못지 않게 국내에도 수많은 오타쿠가 있고, 이들이 좋아하는 콘텐츠에 기꺼이 지갑을 연다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이후 라이센스 비용을 아끼고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자체 IP(지식재산권)를 활용한 서브컬처 게임 개발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오타쿠의 지평을 연 그 이름, 김용하
김용하 넥슨게임즈 블루아카이브 총괄PD. /사진=김용하PD X(옛 트위터)
한국 서브컬처 게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넥슨게임즈의 김용하 PD다. 서브컬처 3대장 중 유일한 국산 IP인 블루아카이브(브루아카)를 만들고, 오히려 오타쿠 본산인 일본에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 오타쿠'다.

브루아카 이전부터 다수의 서브컬처 게임 개발에 관여해온 김용하 PD는 삶 자체가 '성공한 오타쿠'다. 결혼도 유명 코스프레어와 했고, 게임 운영에 조금이라도 미흡한 점이 발견되면 공개방송을 통해 일본식 도게자(머리를 땅에 박고 절하는 사과)를 서슴 없이 행한다. 공개 강연자리에선 "'모에'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지론을 펼치고 다닌다. '모에'는 '싹튼다'는 뜻의 일본어로, 서브컬처에선 특정한 대상에 일본 애니메이션 코드를 입혀 사랑스럽게 의인화하는 것을 '모에화'한다고 표현한다. 우마무스메 같은 게임이 말들의 경주를 배경으로 하는데, 각 경주마들을 미소녀로 모에화한 게 대표적이다.

김 PD는 서브컬처 게임을 즐기는 오타쿠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인물로 꼽힌다. 이를 바탕으로 유저들과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서브컬처 게임이 생명력을 갖고 시장에서 확장될 수 있도록 앞장서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국내 서브컬처 게임 시장은 '김용하가 깔아놓은 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섬세한 오타쿠 심리, 잘못 다루면 역풍까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이용자들이 2022년 9월 13일 카카오게임즈가 위치한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 일대에서 사측과 간담회를 앞두고 마차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뉴스1
오타쿠들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지만, 자신의 취미에 진정성 있게 몰입하고 이를 방해 받으면 역으로 크게 분노한다는 점이 꼽힌다. 특히 서브컬처가 양지로 나오면서 오타쿠들의 집단 행동도 가시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국내 우마무스메 유저들의 마차 시위다. 2022년 9월 우마무스메 유저들은 국내 서버 운영을 하는 카카오게임즈가 중요한 공지를 지연하는 등 일본에 비해 미숙한 운영을 하며 유저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는 이유에서 집단 시위를 벌였다. 우마무스메에 나오는 '말'에 착안해 여러대의 마차를 섭외했고 판교 주요 거리에 마차가 다니도록 했다. 법무법인을 선임해 집단소송까지 추진했다. 이 소송은 이후 카카오게임즈가 전향적으로 유저 친화적 운영을 약속하면서 실제 이뤄지지는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마차 시위에 대해 "서브컬처 이용자들이 상당한 구매력에 더해 행동력까지 갖췄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 사례"라며 "서브컬처 게임을 준비하는 업체들은 단순히 해당 장르의 매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를 즐기는 유저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전했다.

줄줄이 출격하는 K-서브컬처...어떤 게임이 살아남을까
'승리의 여신: 니케'의 캐릭터 라피. /사진=시프트업
성공의 맛을 본 국내 게임업체들은 서브컬처 게임으로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이미 시프트업이 '승리의 여신: 니케'의 흥행 돌풍을 통해 K-서브컬처 게임이 전 세계에서 먹힌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지난해 11월 열린 게임축제 '지스타 2023'에서도 처음으로 '서브컬처 게임 페스티벌'이 열리며 국내 게임업계의 서브컬처 공략 의지를 보여줬다.

넷마블은 올해 하반기 '데미스 리본'을 통해 국내외 오타쿠를 공략할 채비를 하고 있다. 컴투스가 글로벌 유통을 맡을 '스타시드: 아스니아 트리거'도 서브컬처 기대작으로 꼽힌다. 웹젠은 처음으로 자체 IP 기반 서브컬처 게임 '테르비스'를 내놓기 위해 담금질하고 있다. 엔씨소프트가 준비 중인 '프로젝트 BSS' 역시 서브컬처 요소를 듬뿍 담고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지난해 11월 16일 지스타 현장 간담회에서 "서브컬처 같이 그동안 소외된 장르가 메인으로 바뀌는 걸 보며 우리도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오타쿠가 돈을 쓴다'는 단순한 판단으로 서브컬처 게임 개발에 뛰어들면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그 어떤 유저들보다 섬세한 오타쿠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이 기꺼이 구매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와 매력적인 스토리라인을 갖추지 않는다면 아무리 개발력이 좋은 한국 게임사들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트렌드 '서브컬처'를 공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전망이다.

최우영 기자 you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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