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가격 급락…치킨게임 서막인가, 전기차 대중화 발판인가[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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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새 반토막 났다
‘배터리가 0.3위안/Wh 시대에 진입하다’
이달 중순 중국 기술 전문매체 36Kr가 ‘독점’이라며 이런 보도를 내놨습니다. 중국 최대 배터리 기업 CATL이 현지 자동차 기업들에 ‘올해 안에 표준 규격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셀을 와트시(Wh)당 0.4위안 이내 가격으로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식인데요.
‘0.4위안/Wh’란 수치, 좀 생소하죠. 중국에서 LFP 배터리셀 가격이 1년 전엔 0.8~0.9위안/Wh였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1년 만에 셀 가격이 반토막 났다고 보면 되고요.
그런데 어쩌면 가격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립모터(Leap Motor)의 차오리 수석부사장은 이달 10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LFP 배터리 구매가격이) Wh당 0.4위안인데, 올해 안에 0.32∼0.35위안 범위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죠. 현지 배터리 업계에선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 생산원가만 0.3위안이 넘는다”고 손사래 치긴 하는데요. 36Kr은 “경쟁이 치열한 배터리 업체들이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적자 수주’를 한다면 0.32위안/Wh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분석을 덧붙입니다. 선두업체 CATL이 불붙인 배터리 가격 경쟁이 앞으로 더 심화할 거라고 보는 거죠.
하얀 석유의 추락
그럼 배터리값이 왜 이렇게까지 떨어진 걸까요. 그 답은 리튬 가격에 있습니다. 핵심원료인 리튬 가격이 무섭게 떨어지면서 제조사 입장에선 가격을 내릴 여력이 생긴 건데요.
리튬 가격 하락은 수요·공급 법칙에 따른 겁니다. ‘전기차 시대엔 리튬이 대세’라며 그동안 기업들이 앞다퉈 리튬 채굴·정제 산업에 뛰어들었는데요. 오히려 너무 일찍, 많이 리튬 생산에 나선 바람에 공급이 늘어나는 속도가 수요 증가세를 추월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공급과잉이죠.
지금 리튬 가격은 거의 바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리튬 기업의 생산원가가 6.3~9.5만 위안이니까 말이죠. 그럼 더 이상 추락하진 않을까요. 글쎄요. 리튬 재고가 이미 많이 쌓인 기업들이 역마진을 감수하고라도 재고 떨이에 나설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 당분간 리튬 가격이 오르긴 어려워 보이고, 자칫 더 떨어질 수도 있는 거죠.
캐즘과 수요 부진
게다가 전기차 수요의 성장세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 역시 공장 가동률이 60% 이하로 떨어진 중국 배터리 기업이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는 이유인데요. 현대차그룹 경제산업연구센터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순수전기차 시장 성장률은 지난해(26%)보다 낮은 23.9%에 그칠 거라고 합니다.
일단 최대시장인 중국은 경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죠. 부동산 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있어서인데요. 전기차도 중대형 패밀리카보다는 저렴한 소형 콤팩트카 위주로 팔려나가는 추세입니다. 소형차는 배터리가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배터리 제조사엔 반갑지 않은 소식이죠.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전기차 수요가 둔화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신기술에 열광하는 얼리어답터들이 전기차 구매에 적극적이었는데요. 솔직히 이제 초기에 살만한 사람은 다 샀고요. 이제 얼리어답터가 아닌 일반 소비자들까지 내연기관차 대신 전기차로 눈을 돌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아직 장벽이 있습니다. 전기차 값이 아직 비싼데다, 충전 인프라도 부족하죠. 이를 극복하고 주류시장으로 넘어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이를 일컫는 용어가 있죠. 바로 캐즘(Chasm)인데요. 혁신적인 제품이 얼리어답터 중심의 초기시장에서 일반 소비자의 주류시장으로 넘어갈 때, 일시적으로 수요가 오히려 후퇴하는 침체기를 겪는 걸 일컫는 말입니다. 그 틈(캐즘)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뜻인데요. “2023년 글로벌 전기차 침투율이 16%를 돌파하면서 캐즘 단계에 진입했다”(최보영 교보증권 연구원)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기차와 함께 배터리 수요도 일시적으로 침체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시기가 닥쳐온 거죠.
치킨게임의 기억
요약하자면 리튬 가격 급락과 전기차 수요 부진이 겹쳐 배터리 가격이 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단기에 달라지기도 어려워 보이죠. 그래서 불안합니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서인데요. 바로 태양광이나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나타났던 치킨게임이 재현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입니다.
아직까지 중국 기업이 원가 이하로 배터리를 파는 건 아닙니다. 출혈 경쟁은 시작되지 않았죠. 하지만 중국 배터리 업계는 상당한 재고 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국 1위 기업인 CATL의 지난해 재고량이 2019년과 비교해 12.6배로 늘어났다는데요. 만약 악성 재고 밀어내기가 시작된다면? 중국발 치킨게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이미 과거 사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중국 전문가의 우려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진수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중국이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을 만한 산업이 전기차밖에 없다 보니, 그 시장을 육성하려는 의지가 강하거든요. 과거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우 중국 BOE가 한국 기업과의 경쟁을 위해 치킨게임을 벌인 케이스가 있고요. 아마 중국이 작정하고 (배터리 산업도) 그렇게 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기차, 휘발유차보다 싸진다?
너무 우울한 얘기인가요. 하지만 이쯤에서 희망회로를 좀 돌려볼까 합니다. 좀 더 넓게 보면 배터리 가격 하락은 엄청난 기회요인일지도 모릅니다. 캐즘을 뛰어넘어 전기차 대중화 시대로 넘어갈 발판이 될 테니까요.
소비자들이 전기차 사기를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충전? 안전성? 많은 설문조사에선 ‘높은 가격’이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히는데요. 전기차 가격이 비싼 건 배터리 때문이죠. 순수전기차의 경우엔 배터리가 차값의 30~40%를 차지합니다.
그럼 배터리 가격이 얼마나 내려야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만큼 싸질까요. 그동안 보통 그 기준선을 ‘100달러/kWh’로 제시해왔습니다. 배터리팩 가격이 kWh당 100달러이면 보조금이 없어도 전기차 가격이 동급 내연기관차와 같아진다는 겁니다. 어, 그런데 이미 중국산 배터리는 100달러 아래로 내려왔네요?
그렇습니다. 당초 골드만삭스는 2025년, 블룸버그NEF는 2027년에야 글로벌 배터리팩 평균 가격이 100달러/kWh 이하로 떨어질 거라고 내다봤는데요. 이런 추세라면 어쩌면 그 시점이 더 당겨질지 모릅니다. 마침 자동차 업체들은 가성비 좋은 3000만원대 ‘반값 전기차’ 출시를 서두르고 있는데요. 배터리 가격 하락 덕분에 실현이 충분히 가능해졌습니다. 최근 로이터는 테슬라가 암호명 ‘레드우드’라는 보급형 전기차 모델을 2025년 중반부터 생산할 거란 소식을 전하기도 했죠.
그래서 한국 배터리 제조사는 요즘 중저가형 배터리를 열심히 개발 중이죠. 그동안 한국 배터리 업계의 주력 제품은 고급형인 삼원계 배터리였는데요. 요즘엔 중국이 주로 하는 저가형 LFP 배터리도 개발해 양산을 준비 중입니다. 얼마 전 메르세데스 벤츠가 LFP 배터리도 채택하겠다고 밝혔듯이, 점점 저렴한 배터리를 찾는 고객사가 늘어나기 때문이죠.
동시에 중간 가격대 신제품도 개발 중이죠. 삼원계 배터리보다 니켈 함량을 낮춘(40~60%) ‘고전압 미드니켈’ 배터리가 그중 하나고요. LFP 양극재에 망간을 추가해 성능을 높인 ‘LMFP 배터리’도 있습니다. 앞으로 열릴 전기차 대중화 시대엔 어떤 배터리가 대세가 될지 모르니, 다양한 성능과 가격대의 제품을 갖춰 놓는 게 중요합니다. 최보영 연구원은 “LFP 배터리에선 중국산과의 단가 경쟁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한국 기업은 아마도 그보다 한 단계 윗급에서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데요. 아직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초기 단계이고, 아마도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가 될 겁니다. 실적과 주가가 모두 흔들리고 전망도 어두운 이 시기에 터널의 저편을 내다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
딥다이브는 지난해 8월 리튬시장이 공급 과잉에 처할 거란 전망을 전해드린 적 있는데요(딥다이브 리튬 편). 당시 t당 26만 위안이던 탄산리튬 가격이 5개월 만에 10만 위안 아래로까지 떨어질 줄은 솔직히 아무도 예상 못했죠. 참, 시장은 냉정하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전기차용 배터리 가격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 CATL이 배터리셀 가격을 Wh당 0.4위안으로 낮췄다는 소식이 나왔는데요. 배터리팩 가격이 kWh당 75달러 수준으로 내려간 셈입니다.
-공급 과잉으로 리튬 가격이 생산원가에 근접할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인데요. 세계적으로 전기차 수요 성장세가 둔화된 것도 배터리 제조사들이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혹시 이런 가격 급락이 치킨게임의 서막일까요. 혹시 재고 떨이를 위해 역마진을 감수하는 출혈경쟁이 펼쳐질까 우려됩니다.
-동시에 배터리 가격 하락이 전기차 대중화를 앞당길 수도 있는데요. 실적과 주가 모두 어두운 지금이 배터리 기업엔 중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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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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