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서태웅의 하이파이브…친구들만이 줄 수 있는 추억 [ESC]
클럽 강습 ‘농구’에 푹 빠진 아들
동료들과 협업하며 마음도 자라
유소년 대회, 열정과 실력 ‘후끈’
내가 어렸을 땐 주로 골목길에서 놀았다. 전봇대는 훌륭한 지형지물이었다. 농구 골대도 되고 축구 골대도 되며, 야구를 할 땐 홈플레이트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3대 스포츠를 앞집 형한테 배웠고 뒷집 동생한테 가르쳤다. 중학생이 되어 골목을 떠날 때까지 그랬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1학년 남자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된 지금 그 골목길이 참 아쉽다. 이제는 함께 뛰어노는 ‘동네 형·동생’이 없으니 몸을 쓰며 노는 방법은 아빠가 가르쳐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미안했다. 나 편하자고 고작 스마트폰과 노는 방법을 가르쳤거나, 남들보다 잘나야 한다는 핑계로 수학이나 영어를 놀이의 방편으로 들이댔을 뿐.
그러다 지난해 이사를 하면서 뭐라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취미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마침 큰 애는 키도 몸집도 학년에서 가장 컸고, 둘째도 또래 중에 큰 편이라 “농구 배워볼래?”라고 물었다. 별 생각 없이 던진 제안이었는데 작게는 아이의 평생 취미를, 크게는 아이의 인생을 바꿀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제시한 것 같아 뿌듯해하고 있다.
강백호가 되겠다며 머리를 밀었다
골목길이 사라진 시대, 첫째 아이(허이현)를 농구 클럽에 보냈다. 프로농구팀 선수와 감독까지 거친 엘리트 체육인 박성배 감독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아이가 농구를 시작하고 두어달쯤 지난 뒤 감독님이 아내에게 연락을 주셨다. 아이가 키가 크니 선수반으로 옮겨 농구를 시켜보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강습료는 비싸지 않았지만, 토·일요일에도 수업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캠핑도 가고 가족 여행도 가야 하는데 주말마다 농구클럽을 보내는 게 맞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독님이 전화를 주셨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보내시라.” 운동을 한 사람 특유의 기백과 추진력이 느껴졌다. 캐릭터에 차이가 있겠지만 최근 ‘최강야구’ 몬스터즈를 이끌고 있는 ‘야신’ 김성근 감독님과 매우 유사한 화법. 다른 학원 선생님이나 태권도 관장님의 친절함을 상상하던 나로서는 놀라면서도 ‘그러면…애도 좋아하는데, 보내 볼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수반에 처음 다녀온 아이는 이튿날 강백호가 되고 싶다며 머리를 삭발했다. 엔비에이(NBA) 선수들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고 우리 집 컴퓨터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농구로 도배됐다.
무엇이 아이를 집중하게 하는 걸까? 아이가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신기하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엔 아이가 처음 참여한 유소년대회 현장을 경험하면서 많은 걸 깨달았다. 경북 상주에서 열린 ‘상주 곶감배 전국 유소년대회’에 나온 아이들의 열정은 학예회 정도를 상상하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서울과 경기 의정부, 대전과 충남 아산, 세종과 충북 충주, 부산에서 새벽부터 출발해 상주에 모인 아이들은 프로 농구에서나 보던 스크린 등의 팀플레이를 곧잘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진지했다. 아이가 속한 ‘우리 팀’(PSB)은 예선전에서 두 팀을 꺾고 결승 토너먼트에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결승 토너먼트에서 만난 상대가 4학년으로 주로 구성된 팀이었다는 것. 우리 팀은 4학년 현민이·도훈이·이현이, 3학년 나로·형찬이·상원이, 2학년 주호·진호가 경기에 나섰다.
키가 큰 이현이가 처음 스타팅을 뛰며 점프볼을 하는데, 보고 있는 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슛도 드리블도 풋내기지만, 피지컬과 열정만큼은 남다른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응원하는 양호열의 마음이랄까. 우리 팀에는 일찌감치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며 선수가 부족하면 중학생 대회에도 불려 나가는 현민이가 있었다. 심장이 녹을 것 같아서 못 보겠다는 현민이 아빠는 현민이가 돌파를 성공할 때마다 환호했다. 형찬이와 도훈이는 외곽, 상원이는 미들레인지에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았다. 가드인 나로는 큰 형들과 부딪치면서도 계속 돌파를 시도했고, 중간에 한 번 크게 넘어지면서 나로 아빠를 일순간 얼어붙게 했다. 감독님은 매 순간 아이들을 독려하며 최선을 다했고, 엄마 아빠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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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보다 중요한 농구의 즐거움
끝까지 해볼 만한 경기였음에도 감독님은 2학년 진호와 주호, 그리고 처음 대회에 나선 이현이를 다시 경기에 넣었다. 클럽 농구라는 테두리 안에서 승부만큼 중요한 농구의 즐거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제야 부모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경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2학년인 진호가 리바운드에 성공했을 때, 주호가 허슬 플레이로 상대방의 공을 뺏을 때, 이현이가 처음으로 골밑 슛에 성공했을 때, 누구의 아이랄 것 없이 엄마 아빠들은 기뻐했고, 나는 그때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결과는 10점 차 패배.
경기를 직접 뛰는 것도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이의 몫이었다. 상주에서 돌아오는 길, 이제 막 시작했으니 충분히 잘했다고 칭찬했지만, 이현이는 자신이 “더 잘했으면 이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책할 뿐이었다. 피곤해서 잠든 아이를 보면서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와 아빠는 줄 수 없는 승리의 희열과 패배의 분함을 팀원들과 겪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아이는 나와 아내의 손을 놓고, 도훈이와 현민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구를 꿈꾸는 아이로 자기의 자리를 찾아 떠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성장이 마냥 기쁘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아쉽고 여운도 길었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골목에서의 추억을 아이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 만화책에서만 보던 ‘동료’라는 존재를 알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그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모가 아무리 잘나도 소용없고, 오직 친구들만이 줄 수 있는 추억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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