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선택적’ 약자와의 동행…일자리 잃은 중증장애인들
“강의가 끝난 후, 한 학생이 편지를 갖고 왔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는데, 강의를 듣고 감동했다며 내 얼굴을 그린 종이쪽지를 갖고 왔다. 제법 닮게 잘 그렸더라. 코팅해서 간직하고 있다.”
장애경씨(56)는 지난 3년여간 장애인식 개선 강사로 일했다. 장씨는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중증장애인인 장씨는 초·중·고등학교와 기업에서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왔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동료들과 공부를 하고 강의 교안을 연구했다. 장씨의 생애 첫 일자리였다. 이전에는 일하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애인 일자리는 청소·사무보조 등 주로 경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업무가 많았다. 장씨와 같은 중증장애인은 하기 어려운 업무였다. 2020년 7월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이 시작되면서 장씨의 생애 첫 노동이 시작됐다. 일은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면서 장씨의 삶에도 활력이 돌았다. 습관처럼 한숨을 쉬던 버릇도 사라졌다.
월급을 받으면서 매달 시달리던 경제적인 압박에서도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장씨는 주 15~16시간 근무하며 70만원 남짓의 월급을 받았다. 남편도 중증장애인인 장씨 부부가 받는 수급액은 모두 합쳐 월 89만원이다. 장씨를 지원하고 있는 김나라 활동지원사는 “공과금, 휴대전화 비용 등 고정비 빼고 나면 정말 적은 돈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 또 장애가 있고 나이도 있다 보니 장애 보조기구나 비급여 의료비 등 뜻밖에 들어가게 되는 돈이 많다. 이번에 바꾼 휠체어 등받이 시트만 해도 170만원이 들었다”라며 “아껴야 하니 내가 집에서 반찬도 해오고 김치를 담가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늘 어려웠다. 일하기 전에는 애경씨가 돈 아낀다고 밖에 안 나가고 계속 집에만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를 데리고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마음속에 무겁게 쌓인 게 많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장씨는 늘 그를 옥죄었던 생활고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소액이나마 비상금을 모아가며 미래를 계획할 수도 있었다.
서울시만 폐지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지난 1월 1일 장씨는 지난 3년여간 일했던 일자리에서 해고됐다. 서울시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다. 장씨와 같은 중증장애인 노동자 400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장씨에게는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지난 1월 24일 해고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과 노동·인권·시민사회단체들이 모인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최중증장애인노동자 400명 해고 철회 및 원직복직 투쟁을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2020년 서울시가 최중증·탈시설 장애인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시작한 사업이다. 이 사업으로 중증장애인들은 ‘장애인 권익옹호’,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DP)’의 내용과 목적을 시민사회에 알리는 일을 하게 됐다. 한국 정부는 2008년 12월에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국회에서 비준했다. 2014년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대한민국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으로 공무원, 국회의원, 언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과 목적을 공론화해 교육하지 못했다. 이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인권의 담지자로서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인식 제고 캠페인을 벌일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 권고에 따라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장애인 인권보호 활동을 중증장애인이 참여 가능한 일자리로 만든 것이 권리중심공공일자리였다. 장애인 편의시설, 의료기관 이용 시 불편사항 모니터링, 지역사회 관련 제도 모니터링, 장애인 차별 해소를 위한 퍼포먼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강의 및 강사양성, 미술·연극·댄스 노래 등의 창작활동 등이 주요 직무가 됐다.
김기룡 중부대 특수교육과 교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일자리 참여 기회’와 ‘사회적 가치 생산’의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장애인 일자리 정책은 경증장애나 사업주가 원하는 능력을 지닌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추진됐다. 이런 방식의 일자리 정책으로는 중증장애인들이 일자리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직무를 중심으로 새롭게 일자리를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중증장애인이 일을 할 수 있는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장치를 정부가 나서서 마련하고 이를 민간의 영역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 노력은 국가가 나서야 할 공적인 활동 중 하나인데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이를 장애인이 대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장애인은 국가의 활동 중 하나인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증진하는 역할을 하고 국가는 이를 하나의 일자리로 인정해 그에 따른 임금을 지급하는 게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도입 취지라고 보면 된다”라며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곳에만 일자리가 있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가치를 증진하는 것 역시 일자리로 볼 수 있다는 인식을 한다면 장애인이 수행할 수 있는 일자리도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에서 시작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이후 전국으로 확대돼 경기·강원·전북·경남 등 지자체들이 잇따라 도입했다. 올해만 해도 서울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예산을 확대하거나 신규 도입했다. 경기도는 지난해 62억5000만원에서 40% 증액된 88억8000만원을 편성했다. 경기도청 관계자는 “성인 장애인들의 노동권을 위해서 또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일자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도입했다. 올해로 3년째로 아직 성장기이니 도민과 함께 노력해가다 보면 더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전라북도는 지난해 5억1000만원에서 2배 이상 증가된 12억5000만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전북도청 관계자는 “수요가 그만큼 늘었고, 사업효과도 있어 예산을 증액했다”고 말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새로 도입하는 부산은 올해 4억7000만원의 예산을 처음으로 편성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해 8월 부산세계장애인대회 개막식에서 “부산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를 도입하고 지속가능한 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제도 확립에 힘쓰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법안으로도 발의됐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월 ‘중증장애인 노동권 보장 및 고용 활성화를 위한 공공일자리 지원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실적 중심의 장애인 일자리의 문제
다른 지자체들은 사업을 확대 중인데 유독 서울시만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을 폐지하고 새로 ‘장애 유형 맞춤형 특화 일자리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해 12월 20일 서울시는 관련 보도자료에서 “장애 유형에 따른 특성뿐만 아니라 고용시장의 변화까지 고려한 것으로 민관이 협업해 장애인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장애 유형 맞춤형 특화 일자리 사업’의 예로 청각장애인의 일자리인 인공지능(AI) 데이터 라벨러 직무, 중증 근육장애인의 일자리인 불법저작권 침해 콘텐츠 모니터링 직무 등을 들었다. 우정규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정책국장은 이에 대해 결국 중증장애인이 배제되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 정책국장은 “서울시에서 일자리를 복지관 등에 위탁을 하면 복지관 등 위탁기관은 지역사회에 있는 공장, 카페, 스타트업 등에 일자리를 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장애인 일자리를 외주에 또 외주를 주게 되는 셈인데 그러다 보면 위탁기관인 복지관에서 뽑는 게 아니라 해당 사업장에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장애인을 뽑게 된다”라며 “물건을 포장할 수 있나, 1시간 동안 어느 정도 양의 일을 할 수 있나 등의 기능 중심으로 직무를 편성하면 당연히 중증장애인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서울시가 제시한 일자리는 다시 중증장애인 고용을 어렵게 하리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에 대해 “기존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에서 하던 직무를 완전히 다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은 수행업체를 선정 중이고, 아직 심사도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지금 단계에서 이전과 동일한 일자리가 유지될 거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문화예술 활동 같은 기존에 했던 직무에 참여하는 일이 꼭 불가능하다고 볼 필요도 없다”라고 말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사업 추진 배경에는 기능과 실적 중심의 장애인 일자리가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진 사건이 있다. 2019년 12월 중증장애인 동료 지원가였던 고 설요한씨는 “미안하다, 민폐만 끼쳤다”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중증장애인이었던 설씨는 ‘중증장애인 지역 맞춤형 취업 지원 사업’에 ‘중증장애인 동료 지원가’로 채용돼 일했다. 중증장애인 동료 지원가는 다른 중증 장애인의 취업을 돕고 일자리를 연계시키는 일을 한다. 중증장애인에게 취업을 하라고 독려하는 일자리는 있었지만, 막상 설득된 중증장애인이 갈 만한 일자리는 없는 상태에서 이들에게는 한 달에 4명을 5회씩 총 20회 만나는 업무가 부여됐다. 여기에 자조모임을 만들고 상담일지를 작성하는 등의 일이 뒤따랐다. 중증장애인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상담에 참여하지 않으면 월급의 일부를 반납해야 했다. 조은소리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사무국장은 “이후 동료 지원가 사업은 실적의 기준을 낮추고 월급 반납도 없애는 방향으로 수정돼 가고 있었다”라며 “장애인 일자리가 실적을 최우선으로 두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운영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 설씨의 죽음 이후, 중증장애인에게 맞춰진 일자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중증장애인이 직접 자신의 권리를 만드는 일인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고 그 결과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퇴행하는 ‘약자와의 동행’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기능·실적 중심의 장애인 일자리에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권고에 맞춰 ‘장애인 권리생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일자리였다. ‘약자와의 동행’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울시가 이 사업을 폐지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표적화한 여권 내 기류에 맞춘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돼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지난해 7월 국민의힘 시민단체선진화특별위원회는 민주노총, 전장연,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을 ‘3대 불법 폭력 시위단체’로 규정하고 이들 불법 시위단체의 보조금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김도현 비마이너 발행인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국민의힘 당대표 시절 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공격하면서 이후 여권 내에서 전장연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는 흐름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여권 내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정치적인 판단을 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6월 말 서울시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수행단체에 “집회 신고 여부를 불문하고 시위, 집회, 캠페인 활동은 일자리 활동에서 제외한다”고 통보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중 장애인 권익옹호활동은 캠페인 활동, 행진, 홍보 등이 해당하는데 권익옹호활동을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에 앞서 6월 7일 하태경 국민의힘 시민단체선진화특위위원장은 “전장연은 권리중심일자리를 길거리 데모, 농성, 지하철 점거 등으로 축소시켜버렸다”고 말했다. 서울시와 여권이 당시 ‘시민불편’ 등의 프레임으로 낙인을 찍고 있던 전장연의 지하철 집회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무리하게 엮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는 오전 7시 30분에서 8시에 시작하고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보통 오후 1~2시가 출근시간이라 근무시간 자체도 맞지 않았다. 우정규 정책국장은 “권리옹호활동은 지난 3년간 서울시가 직무로 승인하고 보장해왔다. 시장이 바뀌고 서울시의회 구성이 바뀌었다고 무리하게 ‘불법’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폐지한 것은 장애인 탈시설 예산 삭감과 연결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탈시설 장애인 전수조사, 거주시설 연계 자립생활 지원사업 예산 삭감 등 ‘탈시설’에 제동을 거는 서울시의 기조와 맞물려 있다는 평가다.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경우 3개월 내에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동료를 만들고 적응해 생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된 셈이다. 우정규 정책국장은 “서울시가 예산을 전액삭감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나 거주시설연계사업은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와 접점을 넓혀갈 수 있는 사업이다. 시설에 거주하면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하는 중증장애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사회와 접촉 면적을 넓혀가며 탈시설할 수 있는 그런 배경 자체가 사라져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서울시는 ‘약자와의 동행’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잇따른 사업 예산삭감과 낙인찍기 등을 두고 ‘약자와의 동행’이 ‘(선택적) 약자와의 동행’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김도현 발행인은 “사회적인 약자가 시민으로서 조직화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시민의 자발적인 권리인데, 오세훈 서울시장이나 국민의힘 눈에 조직화된 약자는 더 이상 약자로 보이지 않는 듯하다”라며 “개별적으로 무력하게 남아 있는 약자만이 약자이고 시민으로서 조직화된 목소리를 내면 약자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식이라면 ‘약자와의 동행’은 반민주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슬로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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