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고종의 덕수궁 생일축하연에 등장한 ‘일본의 마돈나’ 덴카츠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1. 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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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1910년대 덕수궁 중화전, 돈덕전서 日여배우 덴카츠 마술공연
1911년과 1916년 9월8일 고종의 생일축하연에는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츠의 관능적 춤과 마술이 등장했다. 저녁 3시간 동안 덕수궁 중화전과 돈덕전에서 열린 공식행사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11년 9월8일 저녁 덕수궁 중화전에선 이례적 장면이 연출됐다. 일본 쇼고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1884-1944)의 마술 공연이 열린 것이다. 덴카츠는 메이지 후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마술의 여왕’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의 국민적인 마돈나’(김성연,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쓰의 조선 공연)였다. 마술사 겸 배우였던 덴카츠는 스승 쇼고쿠사이 덴이치와 함께 서구 순회 공연까지 다니면서 서구적 테크닉을 접목한 독자적 마술 세계를 개척한 인물이다. 특히 1900년 우의무(羽衣舞)로 스타덤에 올랐다고 한다.얇은 비단을 걸치고 관능미 넘치는 움직임으로 눈길을 끌었다.

중화전 공연이 열린 9월8일은 고종의 생일이었다. 대한제국 황제를 지낸 고종 육순(六旬)잔치의 주공연을 전부 덴카츠에게 할애한 것이다. ‘본일(本日)은 덕수궁 이태왕전하의 육순탄신인 고(故)로 덕수궁에서 창덕궁 이왕 동(同)왕비 양(兩)전하께서는 오전 8시30분에 덕수궁에 행계하야 축하연에 참여하셨다가 오후 중화전에서 천승기술(天勝奇術)을 어람하시고 동 5시경에 환궁하신다더라’

덴카츠의 마술 공연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11년9월8일)에 실렸다.

일본의 '국민적 마돈나'로 알려진 쇼고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 1911년 9월8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고종 생일축하연 여흥으로 마술이 가미된 무용과 연극을 공연했다. 덴카츠는 191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경성과 조선 전국을 순회공연했다. 옛날 엽서에 실린 덴카츠 사진이다.

◇종친, 이왕직 고등관 부부와 마술 공연 관람

‘순종실록부록’(1911년9월8일)엔 이렇게 썼다. ‘태왕 전하(太王殿下)를 모시고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쇼쿄쿠사이 덴카쓰〔松旭齋天勝〕의 재주 시범을 관람하였다. 종척(宗戚),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 이왕직 고등관 및 그 부인들도 관람하였다. 창덕궁(昌德宮)에서 만찬(晩餐)을 준비하였다. 귀족과 이왕직 고등관에게는 기념품을 하사하고, 판임관(判任官) 이하에게는 주찬료(酒饌料)를 차등 있게 지급하고, 천승(天勝) 등 직물 1권(卷)과 은병(銀甁) 2개(箇) 및 금(金) 500원(圓)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순종 부부가 고종을 모시고, 종실, 중추원 고문, 이왕직 고등관과 그 부인들까지 함께 봤다는 것이다.순종실록부록은 대한제국 궁내부를 계승한 이왕직에서 편찬했다.이왕직은 일본 궁내성 소속인데다 편찬 과정에서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들이 감수를 맡았고역시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이 최종 책임자였기에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1915년 9월11일~10월31일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설치한 연예관. 덴카츠는 10월10일부터 19일까지 열흘간 공연해 초만원을 이뤘다. 에로틱한 춤과 마술적 기교를 담은 '살로메' 공연으로 인기를 모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선물산공진회 ‘히트작’ 덴카츠 공연

덴카츠가 1911년 덕수궁 중화전에서 어떤 공연을 펼쳤는지 구체적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덴카츠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이하 공진회) 당시 오스카 와일드 희곡 ‘살로메’에 마술을 접목시킨 연극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헤롯의 딸 살로메가 추는 ‘일곱 베일의 춤’과 참수당한 요한의 목을 바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쟁반위에 담긴 요한의 머리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는 장면을 마술로 연출해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일곱 베일의 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살로메’에서도 에로틱한 연출로 늘 화제가 되는 장면이다. 10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도 누드 모델 몇 명이 일곱 베일의 춤을 선보여 논란을 빚은 적 있다.

‘공진회’는 총독부가 시정 5주년을 기념해 식민지배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개최한 관제(官製)행사였다. 1915년 9월11일부터 10월31일까지 경복궁 안팎에서 열렸는데, 행사 시설물을 설치하느라 근정전, 경회루, 교태전 등 주요 건물을 제외하고 경복궁내 전각 4000여칸을 철거했다. 문화재청이 최근 펼치고 있는 경복궁 복원 사업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총독부는 관람객 동원에도 상당히 공을 들여 116만6383명이 경복궁을 찾았다. 덴카츠는 경복궁 전람회의 주요 행사장인 ‘연예관’에서 10월10일부터 열흘간 공연했다.서구식 외관의 연예관은 내부는 일본 전통극장 구조인 800석짜리 공연장이었다.연예관 공연 중 거액의 계약금(약3272원)을 받고 유일하게 일본에서 초빙된 공연이었다.관객을 유인할 만한 대중동원력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첫 공연부터 덴카츠의 반나체를 드러내며 관능미를 앞세운 ‘살로메’를 중심으로 마술과 댄스를 선보인 덴카츠 극단은 16일부터는 날개옷 댄스와 전기를 이용한 나비춤, 희극 쥐잡기를 올렸다. 역시 관능과 재미를 앞세운 쇼로 매일 초만원을 이뤘다.덴카츠 공연은 3시간 가량 걸리는 대규모였다.

◇창덕궁 인정전서 덴카츠 공연 본 순종 부부

덴카츠 극단은 공진회 공연을 마친 10월24일 저녁 창덕궁 인정전에서 어전공연을 했다. 순종은 그날 오후6시 창덕궁 식물원 온실에서 데라우치 총독과 각 부처 장관, 조선 귀족과 그 부인 등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을 주재했다. 만찬이 끝난 뒤 순종 일행이 자동차와 마차를 나누어 타고 인정전에 가서 즐긴 여흥이 덴카츠 공연이었다. 마술, 곡예, 서양합주, 독주, 날개옷 댄스 등을 공연했다고 한다. 공연은 10시에 끝났다. 순종은 은으로 만든 화병 1개와 술병 1개, 술잔 1개, 시정 5년 기념 금을 하사했다.

◇ ‘살로메’ 고종 65세 기념 연회에서 공연한 듯

덴카츠는 1916년 9월8일 고종의 생일잔치에 다시 섰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 정도 공연했다. 이정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16년 고종의 65세 탄생 기념연회에서 ‘에로티시즘과 퇴폐미 넘치는 덴카츠의 퍼포먼스로 고종의 관심을 돌리려 한 것같다’면서 ‘1915년 살로메의 폭발적인 인기로 보아 아마도 고종 친림 석상에서도 공연했을 것같다’고 썼다. 1915년 공연한 마술을 가미한 연극 3편(살로메, 신부호궁, 쥐잡기), 모던 댄스, 서양악기 연주, 마술, 곡예에 러시아 여배우가 나선 무용까지 포함된다는 보도도 나온 것으로 보아 덴카츠 극단의 주요 레퍼토리가 망라됐을 가능성이 높다.

2023년9월 재건축한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 당시인 1903년 외국 외교관을 맞는 공관으로 건립했다.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고종의 생일 축하연 오찬과 저녁 공연 장소로 쓰였다.

◇돈덕전에서 열린 덴카츠 마술공연

1916년 9월8일 덴카츠 극단의 고종 생일잔치 공연이 열린 곳은 돈덕전이었다.기존 연구는 이 점을 밝히지 않았는데,’덕수궁 찬시실 일기’에 나온다. ‘(오후)7시 태왕전하, 왕전하, 왕비전하가 (함녕전에서) 나와 돈덕전에 가서 수행원들과 10시까지 여흥(덴카츠 마술·天勝奇術)을 관람했다.’ ‘덕수궁 찬시실 일기’는 조선시대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본떠 이왕직 산하 찬시실에서 날짜별로 작성했다. 매일 시간별로 고종, 순종의 일상을 기록한 1차 자료다.

찬시실이 1916년 고종 생일축하연 장소로 지목한 돈덕전은 1903년 개관한 서양식 건물이다. 고종은 1910년 경술국치후 매년 9월 생일 잔치가 열릴 때마다 돈덕전에서 서양식 오찬과 저녁 여흥을 즐겼다.종친과 이왕직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양식 오찬을 할 때는 서양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덕수궁 찬시실 일기에 따르면, 1915년 9월8일 밤 고종 생일잔치 여흥 때는 고종은 참석하지 않고 순종 부부만 돈덕전에서 일본인 가무를 즐겼다.고종은 이날 오전 함녕전에서 신하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오찬 주재도 건너뛰었다. 순종이 대신 돈덕전에서 서양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오찬을 주재했다.여느 해와 달리 ‘서양요리’라는 언급은 없지만,평소와 같이 양식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순종 부부가 참석한 이날 저녁 여흥은 누가 공연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아 내용은 알 수없다. 하지만 덴카츠 이외에도 고종 생일잔치 프로그램으로 일본 가무가 올라왔던 셈이다.

◇일제가 궁중 연회문화 변질?

이정희 교수는 ‘1910년대 고종 탄신 기념 연회는 전통 궁중 공연에서 상연되지 않았던 양악, 민간 성악곡, 민간 기악곡, 마술, 영상이 각각 배치됐다’면서 ‘전통을 망각시키고, 유흥적인 분위기로 일제가 몰고 가는 형세에 처해 있었다’고 썼다.일제가 궁중 문화를 변질시켰다는 것이다.고종 생일 잔치를 주관한 것도 일본 궁내성 산하 이왕직이기 때문에 일본이 정해놓은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고종은 자기 생일잔치 여흥 프로그램도 맘대로 고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을까. 한사코 싫다고 거부하는데도 총독부가 공연을 강요했을까. 망국(亡國)의 군주는 이래저래 비루(鄙陋)하다.

◇참고자료

덕수궁 ‘찬시실 일기’ 1911-1918

김성연,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쓰의 조선 공연, 국제어문 제76집 2018,3

이정희, 1910년대 고종 탄신 기념 연회의 공연 양상, 공연문화연구 35권, 2017.8

이주희, 쇼코쿠사이 덴카츠의 춤 전개 양상 연구, 무용예술학연구 제34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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