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언니들이 꽉 안아줬다…불타고, 맞고, 으깨진 시인의 세상을
천안 광덕에서 농사짓고 시짓는 김해자
고령 여성 농민들 이야기 시로 받아써
노동운동 등 쫓기듯 살아온 ‘현장’ 떠나
떠밀려 찾아든 곳에서 받은 환대와 치유
상처난 이들과 시대의 아픔들 문장으로
“말해달란 목소리 외면한 건 없나 부끄러워”
“어렸을 적에 들은 이야기인디.”
맹대열(84) 보살이 밥상을 차리며 말했다.
“쩌어기 금강 다리 만들 때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무너져서 인부들이 죽어나가더라네. 부모 형제 없는 걸인 아이를 배부르게 멕여서 세멘 공구리 치는 데 넣었다는 겨. 다음날 보니께 아이가 부처님처럼 가부좌를 틀고 멀쩡히 앉아 있더라는디.”
“여우 이야기도 해봐요.”
김해자(62)가 음식을 받으며 재촉했다.
“생각해봐. 안 무섭겄는지. 어린 여자아이가 죽 쑨다고 앉아 있는디 하얀 여우가 쓱 지나가면서 말여.”
쓰러져 의식을 잃은 어머니를 걱정하며 어린 대열이 미음을 끓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여우가 나타나 물 묻힌 꼬리로 아궁이를 훑어 불을 꺼버렸다. “영물인 여우가 괜히 그랬을 리 없다”며 할아버지가 죽도 물도 며느리에게 먹이지 못하게 했다. 이튿날 어머니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일어나 임종을 준비 중이던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왜 그, 나무꾼 수레 끌던 소가 호랑이 만난 이야기도 재밌던데.”
김해자가 젓가락을 뻗으며 주문했다.
“주인이 소를 내버려두고 지 혼자 살겄다고 도망갔단 말여. 소가 뿔로 범을 받아불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는디 주인이란 놈헌티 얼매나 서운하고 화가 났겄어. 소죽도 안 먹고 단식을 하니께….”
양승분(71) 언니가 밥 먹다 말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지난 11일 저녁 충남 천안시 광덕면용경마을의 맹 보살 집에선 그가 무쳐 낸 오갈피순 나물이 정갈하게 상에 올라와 있었다. 팔순의 몸으로 봄 산을 누비며 채취한 연한 순들이 한겨울 밥상에 향긋한 기운을 보탰다. 그가 차린 밥과 나물에 이야기를 얹어 먹느라 시인은 몇 숟갈 뜨지 않았는데도 배가 불렀다.
“세포마다 이야기가 차곡차곡 쟁여 있는” 할매들이 굴곡진 삶을 굽이굽이 풀어낼 때마다 김해자는 그 말들을 보물처럼 받아 적으며 굽이굽이 시를 불러냈다.
“비로소 시인이 됐다”
시인의 집에 농부의 겨울이 바짝 들어와 있었다.
녹슨 호미와 껍질째 말린 동부콩 다발이 문 앞에서 손님을 맞았고, 마당 아궁이에 올려진 솥은 시래기든 뭐든 삶아버릴 기세로 입을 열고 있었다. 눈 맞은 배춧잎이 배추나무 낙엽처럼 떨어져 바닥에 얼어붙어 있었고, 걷이를 끝낸 밭의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선 쪽파와 시금치가 파릇하게 추위와 대치했다. 창고를 개조한 서재에서도 말린 가지와 호박·고추가 책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다. “만해문학상(백석문학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전태일문학상 등 수상) 상금으로 짠” 입식 나무 책상은 시인이 스스로에게 “처음 주는 선물”이었다.
글은 앉아 버티는 힘으로 쓴다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틈이 없는” 시인은 시도 서서 쓰고, 걸으며 쓰고, 일하다 썼다. 그는 “움직여야 시가 나왔”다. 농협 달력 뒷장에 틈틈이 남긴 메모를 고요한 밤에 바느질하듯 기워 시를 짰다. 그가 최근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을 출간했다. 광덕 전입(2015년) 뒤 낸 시집으론 네번째였다.
“이사하고 구입한 충청남도 지도/ 17만분의 1로 줄인 땅에 우리 동네 애써 찾아/ 점 하나 찍었다/ 점보다 작은 우리 집은 못 찍었다.”(시집 ‘해자네 점집’ 중 ‘검은 씨의 목록’)
점으로도 표시되지 않는 집에 짐을 풀었을 때 김해자는 이미 수없이 쫓겨 다닌 뒤였다.
그는 23살에 대학에서 나와 공장에 들어갔다.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등을 거치는 동안 “곱창 같은 골목”과 “굴속 같은 부엌”과 “전철이 지나가면 따라 덜컹대던 방”(시집 ‘니들의 시간’ 중 ‘시간여행―철로 옆의 연탄방’)을 옮겨 다녔다.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던 인천 갈산동 쪽방과 삼산동 논 가장자리의 벽돌집과 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흙벽 집과 효성동·송현동·송림동·주안동의 닭장집들(시집 ‘집에 가자’ 중 ‘어진내에 두고 온 나’)을 떠돌았다. 그는 한때 “몸을 누였던 방들을 세어”보다 “스무 군덴가 세다 말고 소주를 마시고”(노지영 대담집 ‘뒤를 보는 마음’) 말았다.
언제부턴가 그의 “머릿속에선 자주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했다. “살기 위해 내 시대의 한복판으로부터, 익숙한 동지와 친구들에게서조차 멀어져”(시집 ‘집에 가자’ 중 ‘시인의 말’) 2008년 봄 전북 전주로 이주했다. ‘정주’는 그가 함부로 가질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2014년 겨울 갑자기 집주인이 바뀌면서 “일방적으로 쫓겨난” 그는 “빵 배달하는 후배에게 농촌의 허름한 슬래브 집을 보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광덕의 한 농가주택을 찾아 들어왔다. 6년이 지나자 여지없이 퇴거 요구를 받았다. 이장이 “마을에서 계속 살 생각이 있냐”고 묻더니 지금의 집을 소개했다. 쫓겨날 걱정 없는 그의 첫 집이었다.
평생 쫓기듯 살아온 시인을 ‘더는 어디로든 보내지 않겠다’며 꽉 안아준 사람들은 궁벽한 농촌의 ‘할매 언니들’이었다. 손익계산으론 설명할 수 없는 우정과 환대였다.
“한 달여 비워둔 집/ 엉거주춤 남의 집인 양 들어서는데 마실 다녀오던/ 아랫집 어머니가 당신 집처럼 마당으로 성큼 들어와/ 꼬옥 안아주신다 괜찮을 거라고/ 아파서 먼 길 다녀온 걸 어찌 아시고 걱정마라고,/ 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았다고 얼까 봐/ 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시집 ‘해피랜드’ 중 ‘이웃들’)
2019년 암 수술을 받고 한달 만에 돌아온 집엔 할매 언니들의 손길이 가득했다. ‘해자 왔다’는 소식에 언니들이 인삼과 엄나무를 넣고 토종닭을 고았다.
“아침 식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랫집 어매가 국솥을 들고 서 있었다/ 노랗고 동그란 토란이 새알처럼 굴러다녔다/ 육개장이었다 어매는 잠시 기다리라더니 대추와 은행과 밤 팥 콩이 가득한 찰밥을 솥째 들고 왔다// 옆집 언니가 무장지와 오이지 파래고추장구이와 내 몫으로 담가놨다는 김치통을 밀개차로 싣고 왔다.”(시집 ‘해피랜드’ 중 ‘인류, Human Being’)
밥상 앞에 끌어다 앉혀 놓고 할매들이 먹인 음식과 음식에 버무린 말들이 아픈 시인을 살렸다. 용이 밭을 갈며 승천했다(용경·龍耕)는 마을에서 시인은 언니들에게 배운 호미질과 낫질로 지난 시간을 갈아엎었다. 띄어쓰기와 독해 연습부터 다시 시작(시집 ‘니들의 시간’ 중 ‘육독’)했다. 부추, 돌나물, 더덕, 개망초, 꽃마리 등 가난해도 무엇 하나 기죽지 않는 그의 “텃밭 공화국”에선 “추위와 배고픔을 증명하지 않아도 기초수급은”(시 ‘연푸른 혀들’) 됐다. “나는 광덕에 와서야 비로소 시인이 됐다”고 김해자는 말했다.
신화·전설·생명이 한 몸에
“말린 통고추 남았지? 몇개 좀 갖고 올겨?”
맹 보살이 어느 오후 김해자에게 전화했다. 여느 농사꾼들처럼 제때 고추를 빻지 못했을 시인을 알기에 하는 부탁이었다. 고추를 챙겨 갔더니 맹 보살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했다.
“저렇게 아픈디 뭐라도 해야지 않겄어.”
그가 고추에 불을 붙였다. 고추를 사르며 “우리 분이 팔 좀 그만 아프기를” 기원했다. 양승분 언니는 고된 농사일로 뼈가 닳아 통증이 심했다. 그렇다고 맹 보살이 딱히 누구한테 비는 건 아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디 왜 빌어유. 잡귀 나가라는 거유. 매운 기운 애써 참지 말고 나가라구유.”
맹 보살은 아끼는 사람이 아프면 말린 고추를 태웠다. “어릴 적 어른들한테 배운” 응급처방이었다. “귀신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까지 위로하는 행위”(김해자)였다. 맹 보살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실제인지 허구인지 경계가 불분명했다. “그런 이야기를 수백 수천개 가진” 그는 시인의 눈에 “신화와 전설과 생명이 통합돼 있는 사람”이었다. “식당 일 30년, 공사판과 반찬가게 10여년, 절에서 공양주 보살 생활 10년.”(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50년을 한 문장에 눌러 담기에 그의 주름진 세월은 겹겹이었고 첩첩이었다.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밤에 강으로 갔는디 컴컴항게 암것도 뵈지 않으니께 여가 거근지 거가 여근지 모르겄더라고. 일단은 들어갔어. 근디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더라고. 막 뜨니께 으디를 붙잡을 디도 읎구, 죽으러 드갔는디 죽어야 하는 건지 살아야 되는 건지, 이 꼴로 으디를 가나, 내 맴만 젖었다니께.”(시 ‘월식’)
시인이 그의 말을 받아쓰자 시가 됐다. 김해자에게 시 쓰기란 그 할매들의 말을 받아 적는 것이기도 했다. “수없이 밥을 같이 먹으며 울고 웃어야 들을 수 있는” 시였다. “오장육부에 이야기를 담은 서랍이 있는 것 같았”다. “툭 치면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내 시의 3분의 1은 ‘시 안 쓰는 시인들’이 써준 거예요. 그들의 이야기에 연결될 때 쓰고 싶은 욕망이 일어요. 열번쯤 받아쓰면 시 한편 쓰는 것 같아요.”
김해자가 양승분의 아픈 팔을 잡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고추 태운) 덕분에 한결 덜한 것 같다”며 양승분이 배시시 웃었다.
“이건 두부 수분 짤 때 쓰던 건데.”
나무 막대기들을 발처럼 엮은 기구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용도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자태로 걸려 있었다. 감나무가 울창한 양승분의 집 마당 창고엔 시아버지 대부터 사용해온 오래된 농기구들이 빼곡했다. 양승분은 기업농과 상업농이 잠식해가는 농촌에서 머지않아 멸종될 ‘소농’이었다. 그는 조각조각 흩어진 땅에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농사를 지어 사람들과 나눴다. ‘산막골밭’에서 배추와 고구마를, ‘뚝너머밭’에서 마늘과 옥수수를, ‘양지촌밭’에선 깨와 콩을 거둬도 연 수입 500만원이 못 됐다. 그 수확물로 형제자매, 친지, 지인, 동네 주민들과 이웃 마을의 홀몸노인들까지 챙기는 “언니를 보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지 놀라웠”(김해자)다.
“시적인 삶, 혹은 시적인 태도로 나와 이웃과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시인 아닐까요. 그러니 양승분 씨야말로 진짜 시인입니다.”(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광덕살이 이후 출간된 시집들(2015년 ‘집에 가자’, 2018년 ‘해자네 점집’, 2020년 ‘해피랜드’, 2023년 11월 ‘니들의 시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이름들은 이제 김해자 시의 밭이자, 씨앗이며, 시 그 자체가 됐다. 그가 ‘할매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김해자는 무당이야.”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6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가 주최한 추모제가 열렸다. 김해자는 ‘오직 진실만이 위로입니다’란 제목의 글을 낭독했다. 그 글에서 낮술에 취해 거리를 걷던 시인은 광장 귀퉁이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기저귀를 채워준다. 현장에 있던 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시인에게 원고 종이를 받아 그해 9·10월호(격월간)에 여는 글로 실었다. 다음 호에선 김해자의 시 10편과 그의 삶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례적인 기획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김해자를 ‘만신’ 또는 ‘샤먼’이라고 평했다.
2020년 6월25일 이른 아침 김해자가 잠을 깼다. 꿈에서 과일과 떡이 가득 차려진 상을 봤다. 가슴에 북두칠성이 그려진 여승이 병풍 뒤에서 나와 춤을 췄다. 병풍 쳐진 방은 영안실일 거라고 짐작했다. 물을 한 모금 넘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종철 선생님의 사망 소식”이 건너왔다. 김해자는 “그런 점에선 나는 샤먼이 맞다”고 했다. 그에게 “선생님과의 만남은 삶의 화두를 바꾸는 사건”이었다. 고인의 장례식장에서 읽은 추모시(‘나무 아래로’)를 시집 ‘해피랜드’에 고이 넣었다.
무당·샤먼·점쟁이…
“하늘 저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고/ 그 우물 곁에 새 한마리 산다고 (…)// 그 새가 당신 이마 위에 이슬을 떨어뜨린다고/ 그 한방울이 시라고/ 그 한방울이 신이라고.”(시 ‘달이 내 창문을 서성이고 있다’)
그의 받아쓰기에선 이슬 한 방울이 시가 되고 신이 되는 ‘신비’가 펼쳐졌다.
“제가 시를 쓰지만 제게 고유한 무엇이 있어서 쓰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가 ‘받아라’ 하고 갑자기 문장 혹은 말을 휙 던져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꿈은 시가 그에게 오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다. ‘그 꿈’에서도 아기가 나왔다. 달려오는 기차를 몸으로 받아 내던 여인이 타들어가는 아이를 그에게 던졌다. 그가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리는 동안 아이는 점점 쪼그라들어 갓난아기처럼 작아졌다. 용산참사 직후 만난 이 꿈은 ‘다음 내리실 역은’이란 시가 됐다.
“뜨겁다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한 아아아 모음뿐인 외침과 절규가 환청처럼 들리는데, 지상에서 영원히 철거당한 차가운 주검 곁, 새가 운다.”
김해자의 시에선 옥상에서 불탄 사람들,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사람들(‘피에타’ ‘김동협’ ‘이태민’), 도심의 골목에서 사람에게 깔린 사람들(‘감긴 눈꺼풀 곁에서’), 경찰 진압봉에 찍히고 두들겨 맞은 사람들(‘그는 아들을 내려놓지 않았다’), 항구 컨테이너에 깔려 으깨진 사람(‘삽목’), 폭탄에 사지가 찢긴 사람들(‘니들의 시간’)이 그의 귀로 찾아와 울고 그의 입을 빌려 말한다. 시인이 뇌 수술 직후 겪은 극심한 두통은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 열차에 치인 청년과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에 끼여 사망한 제빵 노동자의 감각에 포개진다. 나 아닌 타인, 우리 아닌 너희, 원청 아닌 하청, 한국인 아닌 이주민, 인간 아닌 비인간. ‘니들이 뭔데?’로 취급받는 ‘니들’의 목소리들이 그의 시에서 지글지글 끓는다.
“아픈 이야기를 들을 때 제 귀가 열리는 걸 느껴요. 죽은 존재가 옆에 있고 살아 있는 귀신들도 제 옆에 있는 것 같아요.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제 곁으로 날아오는 새들이에요. 제 손과 글에게 뭔가를 말하라고 시키는 존재들이고요. 귀신도 신이죠. 보이지 않는 존재(신)가 먼 길을 날아와 내게 물어다 준 이슬(말)이 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못 알아차리는 소리는 없는지 미안해져요. 입에 물고 밤새 달려와 톡톡 문을 두드리는데, 제가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진 않은지. 그게 부끄러워요.”
이튿날 시인의 집에선 그가 친구들을 위해 끓인 시래깃국으로 구수한 밥상이 차려졌다.
“이건 네 김치 맞냐?”
‘이 도끼가 네 도끼냐’는 산신령의 질문처럼 이미혜(63)는 김치를 먹을 때마다 물었다. 이번에도 아니었다.
“양승분 언니 김치. 총각김치는 백유선씨 거.”
시인이 올린 김치 접시엔 “이 집 저 집 김치가 다 섞여” 있었다. 맞은편에선 이들(60)이 이미혜가 만든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다.
세 사람은 “파란의 시기를 함께 보낸 사이”(김해자)였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같이했던 ‘동지’였고, 숱한 동지들을 먼저 떠나보낸 ‘상주들’이었다. 1987년 6·10 항쟁 전후로 해고된 김해자·이미혜와 1991년 원풍물산 노조를 조직하자마자 해고된 이들은 생산공동체 ‘미모사’의 직장 동료이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도시락’(이미혜)과 ‘모든 이들 곁에’(이들)는 김해자가 두 사람을 생각하며 쓴 시였다.
인천을 떠난 뒤 김해자와 둘 사이의 연락도 뜸해졌다. 2018년 ‘해자네 점집’ 출간 당시 열린 북토크에 두 사람이 찾아오면서 재회했다. 이미혜는 현재 인천에서 시민사회단체와 지역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하는 협동조합 일을 하고 있다. 김해자는 지난해 직접 기른 무로 동치미를 담가 이미혜에게 납품했다. 미모사 이후 치킨집, 세탁소, 국밥집 등 ‘온갖 일’을 거쳐 뒤늦게 대학 공부를 시작한 이들은 최근 김해자의 시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현재 박사과정)를 받았다.
“너는 점치고 나는 밥하고. 우리 돈 많이 벌어서 어떻게 값지게 쓸 수 있는지 보여주자.”
이미혜가 던진 농담으로 밥상이 왁자지껄해졌다. 김해자가 “네가 옆에 있으면 사람들이 기운을 받고 으쌰으쌰하게 된다”며 이들의 사주명리를 읊고 있을 때였다.
김해자는 ‘점치는 시인’이기도 했다. 딸이 공부하겠다며 사다 둔 주역과 명리학, 점성학, 에니어그램책들을 몸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들여다봤다. 어느 순간 동서양의 원리가 연결되고 벽을 트더니 “신빨 영빨 차곡차곡 쌓여 전문성을 인정”받는 경지에 올랐다. 딸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유능한 점쟁이가 될 줄 몰랐다”며 신기해했다.
김해자에게 점은 “길흉화복을 엿보는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수단”이었다. 도무지 강의 진행이 힘든 ‘기초수급자를 위한 소양 교육’에서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매 하나 찍어서 실실 타로점을 봐주”자 “눈물이 강물이 되어 휘몰아”치더니 “지퍼 속에 갇힌 입들이 지퍼를 열고 나와 저도요 저도요”(시 ‘해자네 점집’)했다. 알코올치료센터와 쪽방상담소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인 ‘이 술 다 묵고 죽자 대회’도 그렇게 썼다.
시의 쓸모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날 밤 시루떡과 과일을 작은 상에 놓고 김해자와 친구들이 신년제를 올렸다. 고된 시간을 건너고서도 함께 앉아 밥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은 고마웠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기원을 올릴 때 순서를 받은 김해자가 빌었다.
“동네 뒷산 이름(평평골)처럼 우리 마을 굴곡 없이 화합하게 해주세요.”
“히말라야 머리가 깨지고, 알프스 가슴이 풀어 헤쳐지고, 남극 빙하가 피눈물 흘리는”(시 ‘나무 아래로’) 시대였다. 그 세계의 끝에 놓인 작은 농촌 마을에서 “나 죽을 때 옆에 있어 달라”며 손잡는 언니들을 보며 시인은 문득 시의 쓸모를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받아 적은 시를 시인이 읽어주면 맹 보살은 “내가 한 말 중에 쓸모 있는 말도 있다”며 “감격”했다. 시인이 존엄한 자리로 올리고 싶어 하는 언니들이 정작 시가 된 자신의 말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김해자 시의 모순이자 슬픔이었다.
“삶과 몸과 이야기가 하나인 사람들은 농촌에서도 이분들이 마지막이에요. 위대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거예요. 부끄러운 웅얼거림이 만일 시라 불릴 수 있다면 저는 공들여 부단히 읊조릴 겁니다. 벌레 먹힌 복숭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복숭아를 떼주고 잘려 나간 가지 입장에서 보는 것, 그 가지 끝에서 붉은 잎이 돋아나길 기다리는 것. 시가 말할 수 있는 희망이 고작 그뿐일지라도요.”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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