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英蘇 정상 동시에 암살” 2차대전 운명 바꿀뻔한 나치의 작전

유석재 기자 2024. 1. 27.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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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기자가 쓴 스파이 논픽션

암살자의 밤

하워드 블룸 지음 | 정지현 옮김 | 타인의사유 | 400쪽 | 1만9800원

1943년 11월,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크림반도의 심페로폴에서 Ju-290 수송기가 이륙했다. 적국 순찰대를 피하려고 1만8000피트(약 5500m)까지 고도를 높인 이 비행기에는 카키색 소련 군복을 입은 독일 요원들이 낙하산을 멘 채 강하 지점인 이란의 테헤란 근처에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극비 사항으로 남아 있던 ‘롱 점프 작전’의 시작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5년째로 접어들던 그해, 독일군은 이미 전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강화 협상 조건을 만들어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최악 상황은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과연 어떻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애슐리 역을 맡았던 영국 배우 레슬리 하워드는 이해 6월 포르투갈에서 본국으로 가는 여객기를 탔다. 이 비행기는 대서양 상공에서 독일 전투기에 격추당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독일 스파이가 하워드의 매니저를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처칠이라니! 그랬다. 독일은 연합국 수뇌부를 암살하려 했다.

이제 전쟁의 이면에서 또 하나 치열한 전쟁인 첩보전이 본격화된다. 나치 국가보안본부 제6국장 발터 셸렌베르크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한곳에 모여 회담을 진행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빅3′를 한 번에 암살할 수 있다면? 문제는 세 명이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앙카라 주재 영국 대사의 유고슬라비아계 하인이 금고 속 문서를 촬영한 사진을 독일 측에 팔았다. 그 속에 답이 있었다. “11월, 테헤란!” 합쳐서 세계 해·공군의 4분의 3을 통제하고 2000만명 가까운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세 사나이가 거기서 만나게 된다.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그러지 말고 셋 다 생포해 오라”고 했지만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전대미문의 ‘미·영·소 3정상 동시 암살 계획’인 롱 점프 작전이 실행에 옮겨진다. 황당한 작전이라고만 볼 수 없었던 것이, 독일 첩보 기관은 3국 정상이 동시에 모이면서 암살 실행에 가장 좋은 곳이 11월 30일 처칠의 69번째 생일 파티 자리임을 정확히 간파했고, 테헤란은 이미 자국 스파이가 활동하며 친(親)독일 인맥도 있는 곳이었다.

세부 작전 역시 꼼꼼했다. 독일에 항복한 옛 소련군을 위장시켜 ‘총알받이’로 쓰는 동시에 연합국 대사관으로 이어진 상수도관으로 은밀하게 암살단을 투입, 휴대하기 좋고 살상력이 뛰어난 영국제 개먼 폭탄을 던진다면 세 나라 정상과 수행원·경호원들이 모인 실내는 순식간에 불지옥이 될 터였다. 게다가 산 속에 갇힌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를 탈출시키는 작전을 완수했던 특급 요원 오토 스코르체니도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하지만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계획이라도 실행 단계에선 예상치 못한 온갖 난관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나치에 심은 소련의 이중 스파이가 모스크바에 정보를 타전한 결과 낙하산 부대 1진은 땅에 닿기도 전에 궤멸됐고, 낙타와 트럭을 이용해 잠입하려던 팀은 자전거 탄 소년의 신고로 적발됐다. 위험을 감지한 스코르체니는 황급히 베를린으로 회항했고, 상수도 위치를 아는 요원은 미군 방첩단에 체포됐다. 계획상 투입돼야 했을 50명 중 남은 요원은 단 6명. 여전히 무기와 장비를 지닌 이들은 과연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작가인 저자가 쓴 이 논픽션(원제 ‘Night of the Assassins’)은 최근 출간된 스파이 관련 서적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볼프강 크리거의 ‘비밀 정보기관의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디테일이 살아 있고, 냉전 시대를 다룬 벤 매킨타이어의 ‘스파이와 배신자’와는 달리 전시(戰時)의 첩보전이다. 치밀한 구성과 급박한 장면 전환, 눈에 보이는 듯한 인물 묘사, 끝내 모두 회수되는 ‘떡밥’(복선)의 배치를 통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서술이 온갖 문서·보고서·회고록을 정교하게 분석·대조하고 취사선택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독일 첩보 기관과 미 대통령 경호원의 시점에서 주로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니 사건의 또 다른 주역인 소련 측 활동을 지나치게 간략히 서술한 아쉬움은 남는다.

책은 요원들이 그토록 기를 쓰고 작전을 수행하려 한 이유에 대해, 당시 루스벨트가 이집트 상공에서 피라미드를 보며 남겼다는 말로써 암시한다. “기억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거대하다.” 때로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역사 전체로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인간의 거대한 욕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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