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없었다… 양승태, 47개 혐의 모두 무죄
1심 법원 “직권남용 없어”… 박병대·고영한 前대법관도 무죄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함께 기소된 박병대 전 대법관과 고영한 전 대법관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세 사람에게는 ‘재판 개입’ ‘판사 블랙리스트’ ‘법관 비위 은폐’ 등 47가지 혐의가 적용됐는데 모든 혐의가 무죄로 판정된 것이다. 2019년 2월 검찰이 기소한 지 4년 11개월 만이다.
이 사건은 애초 법원의 세 차례 자체 조사에서 “직권남용 등 범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진 것이었다. 그런데 2018년 9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의혹은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고 하자, 김명수 대법원장이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면서 검찰이 본격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양 전 대법원장을 포함해 고위 법관 총 14명이 기소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출신으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핵심 혐의는 숙원 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 등을 위해 박근혜 정부의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소송 등에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인터넷 댓글 조작 사건, 전교조 법외(法外) 노조 사건 등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이를 포함한 주요 혐의에 대한 공범으로 박 전 대법관과 고 전 대법관도 기소됐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재판장 이종민)는 “피고인 3명은 모두 무죄”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대법원장도 재판에 개입할 권한은 없고, 권한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직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거나 남용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 행사를 방해한 바가 없어 직권남용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적용된 다른 혐의들도 전부 무죄가 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무죄 선고를 받은 뒤 취재진과 만나 “당연한 귀결”이라며 “명백하게 판결을 내려주신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검찰은 “1심 판결 사실 인정과 법리 판단을 면밀히 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은 일부 판사들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별도 관리하면서 다른 법원으로 전보 발령한 혐의 등도 받았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일부 법관에 대해 불이익한 인사 조치를 한 것은 인정된다”면서도 “전보 등 인사와 관련해 인사권자에게는 폭넓은 재량이 있고 (개별 판사의) 근무 희망지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인사 조치는 재량권 남용이나 일탈에 해당하지 않아 위법하지 않다”고 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에게 연구회를 탈퇴하게 했다는 혐의, 현직 법관들의 비공개 온라인 카페를 와해시키려 했다는 혐의, 긴급조치에 따른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을 인정한 판결을 한 판사들을 징계하려고 했다는 혐의 등에 대해서도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대해 판사 출신인 변호사는 “이날 판결은 직권남용에 관한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양 전 대법원장 등은 ‘정운호 게이트’ 관련 판사 비위를 감추려고 검찰 수사 기밀을 수집하려 했다는 혐의 등도 받았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수사 기밀을 실시간으로 입수해 검찰 수사 확대를 저지할 방안을 수립하는 데 개입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밖에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기획재정부 공무원들과 국회의원들을 속여 공보관실 운영비 명목으로 정부 예산을 받은 뒤 대법원장 격려금 용도로 썼다는 혐의도 무죄가 됐다. 속임수를 쓴 적이 없거나 금전적 이득을 챙길 의사나 실제로 이득을 챙긴 사실이 없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한편 사법 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기소된 고위 법관 14명 중에 6명은 이미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다른 4명은 항소심까지 무죄 또는 일부 유죄를 받고 대법원 재판 중이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 등 3명이 1심 선고를 받았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다음 달 5일 1심 선고를 받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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