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섯 가득 넣은 냄비에 커다란 만두가 동동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4. 1.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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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만두 전골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수라'의 만두전골. /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20대 첫 직장은 마트였다. 서울 사대문 안, 높은 빌딩이 아니라 강서구 아파트 단지 틈바구니에 있는 대형 마트로 매일 출근했다. 남들이 쉬는 주말에 일하고 평일에 쉬었다. 오후조가 되면 점심을 먹고 회사에 나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한밤중까지 근무를 섰다. 마트 구내식당에서 먹는 밥은 금방 배가 꺼졌다. 온종일 마음먹고 걸으면 2만 보는 쉽게 채웠다. 자정이 지나 퇴근을 하면 바로 집에 가기 아쉬웠다. 배가 고프고 목이 칼칼하단 핑계로 삼겹살, 치킨, 순댓국 같은 음식을 자주 먹었다.

어느 날 마트 근처에 살던 직원이 다른 메뉴를 이야기했다. 강서구청 가는 길목이었다. 컴컴한 밤길을 앞사람의 등만 보고 쫓아갔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을 굴러도 찬 바람에 몸이 크게 떨렸다. 그날 밤 고춧가루를 듬뿍 풀고 버섯을 가득 넣은 전골냄비가 앞에 놓였다. 커다란 만두가 동동 떠 있었다. 앞접시에 만두를 건져 놓아도 열기가 쉽게 식지 않았다. 칼국수 사리를 넣고 끝내는 죽까지 끓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조잘거리며 떠들고 웃었다. 가로등 불만 남은 새벽 한가운데였다.

시간이 갈수록 전골 같은 음식을 자주 먹지 않게 된다. 점심을 먹어도 각자 한 그릇씩 나오는 메뉴가 편하다. 가스불을 올리고 불 조절을 하고 국자로 퍼서 음식을 나누고, 이 모든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질 때가 많다. 혼자 밥 먹는 일도 흔해졌다. 기계적으로 젓가락질하며 눈으로는 휴대폰만 바라보다 점심시간이 끝나버리기도 한다. 영등포구청역 바로 옆 골목, 건물 2층에 있는 ‘수라’라는 집은 가게 이름 옆에 붙은 첫 번째 메뉴가 바로 만두전골이었다.

어릴 적 초대를 받아 간 교회 목사님 댁의 거실처럼 창가에는 커다란 화분이 놓였고 벽에는 성경 문구가 걸렸다. 테이블은 말끔하게 닦여 윤이 났는데 음식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이미 어떤 맛인지 짐작이 갔다. 하늘색 셔츠에 니트 조끼를 걸쳐 입은 주인장은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카운터에 서서 점심 예약 명부를 천천히 들여다봤다. 만둣국, 손칼국수 같은 1인 메뉴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장이 굳이 대표로 써놓은 메뉴를 먹어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뉴를 고르는 원칙은 첫째가 남들이 많이 먹는 것, 둘째가 주인장이 추천하는 것이다. 주문을 하고 찬을 받는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예약된 테이블을 빼놓고 나면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만석이 되었다. 심심하게 맛을 낸 감자 샐러드를 먹으며 음식을 기다렸다.

요즘 전골 요리는 주문을 받자마자 조리 전 상태로 손님상에 올리는 게 보통이다. 주방에서 조리하는 시간도 아끼고 손님 입장에서도 조급증이 덜 난다. 이 집은 애초에 손님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끓여 나왔다. 덕분에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보글보글 끓고 있는 만두전골을 보자 그 지루함은 금세 가셨다. 커다란 만두가 냄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배추로 맛을 내고 당근과 미나리로 색을 맞췄다. 소뼈를 고아 뽑은 사골 육수의 뽀얀 빛깔은 냄새를 맡지 않아도 그 농도를 알 수 있었다.

만두를 국자로 퍼서 한입 베어 물었다. 애호박, 배추, 두부, 고기를 갈아 넣은 만두소는 파란 하늘에 뜬 하얀 구름을 베어 먹은 것처럼 맛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만두를 먹고 코로 숨을 쉬면 채소에서 비롯된 순한 단맛이 느껴졌다. 치맛자락을 넓게 펴고 곱게 앉은 듯 만두 모양은 어그러진 구석 없이 단정하여 먹는 이도 저절로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었다. 국물도 한 숟가락 먹어보니 간이 딱 부러져서 맛에 빈틈이 없었다. 먹는 사람은 그저 올바로 수저를 잡고 먹는 데 집중하면 됐다.

만두를 먹는 사이 나온 녹두전 역시 기름에 튀기듯 구워 기름진 맛이 과하거나 혹은 속이 덜 익어 무르지 않았다. 적당히 섞은 고기는 간간이 씹혔고 녹두의 과하지 않은 고소한 향이 먹는 내내 입안을 채웠다. 국물이 졸아들 즈음에는 종업원이 어느새 와서 육수를 다시 부어 넣었다. 칼국수 사리는 주방에서 한소끔 삶아 식혀 냈다. 보통 덧가루가 묻어 국물에 넣으면 농도가 변하고 지저분해지는데 이 집은 그럴 일이 없었다. 반투명한 상아색에 탄성이 단단한 면은 어느 것도 소홀하지 않는 이 집 주인장의 성격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자작하게 졸아든 국물을 걷어내고 볶음밥까지 해 먹으니 식사가 끝이 났다.

불을 올리고 국물을 끓이고 서로에게 건더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동료들이 있었다. 새벽녘 집에 갔다가 쪽잠을 자고 나오면 다시 그 얼굴이 보였다. 어깨 한 번 툭 치고 씩 웃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 일도, 세상도 견딜 만했다. 목소리가 크고 손아귀가 억세던 그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그때처럼 건강하기를, 그리하여 서로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수라: 만둣국 1만1000원, 만두전골 1만4000원(2인분 이상 주문 가능), 녹두전 반접시 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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