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으로 위장한 천사들이 우리 곁에 있었네
비번일에도 사람 구하는
경찰·소방관·의료진
지난해 10월 경기도 화성의 한 편의점 앞. 한 남자 대학생이 방금 구매한 기프트카드(무기명 선불카드) 수백 장을 초조한 표정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반바지 차림으로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던 30대 아빠가 그 모습을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동네를 한 바퀴 돈 아빠는 그 학생이 또 다른 편의점에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곧장 따라 들어갔다. “전 수원남부경찰서 유창욱 경사입니다. 왜 이렇게 기프트카드를 많이 사세요?”
대학생은 검찰을 사칭하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기프트카드를 150만원어치 사서 코드를 전송했고, 추가로 200만원어치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유 경사는 피싱 일당과 대신 통화한 뒤 범죄를 확인하고, 본부에 신고했다. 휴일에도 ‘촉’을 발동시킨 유 경사는 “아이와 함께 있었지만 범죄로 보이는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11월엔 서울 한 대학 병원에 근무하는 20대 새내기 간호사 4명이 비번일에 귀한 생명을 살렸다. 북한산에 간 등산복 차림의 간호사들은 한 중년 남성 등산객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자 심폐소생술(CPR)로 응급 조치했다. 역시 비번일에 북한산을 오르던 고양소방서 소속 박준흠·양주경 소방장 부부는 다리 다친 30대 여성을 업고 헬기장까지 이동해 구조 헬기에 태웠다.
비번(非番·당번을 설 차례가 아님) 공직자나 의료진의 선행이 곧잘 뉴스를 탄다. 다음 업무를 위해 휴식해야 하는 날, 자기 관할이 아닌 곳에서 생명을 구하고 범죄를 막는 숭고한 직업 정신에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 사복(私服) 입은 천사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싹튼다.
지난달 비번일에 가족과 눈썰매장을 찾은 충북소방본부 전인호 소방장은 이동 통로가 무너져 사람이 깔리자, 맨손으로 얼음을 들어내고 CPR로 의식 잃은 이들을 살려냈다. 양주소방서 박수민 소방사는 여느 20대처럼 예쁜 옷을 입고 성탄 연휴를 즐기다 서울 도봉구의 식당에서 불길이 일자 주저 없이 소화기를 들었다. 경남 사천경찰서 조연제 경위는 비번일에 산책하다 불난 집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80대 노인을 구했다.
미담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떻게 그냥 지나치나” “내 동료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위험 회피 본능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은, 사명감이 생명인 직업인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번의 선행은 당연한 게 아니다. 경찰·소방관이나 응급 의료진은 철야 당직 후 비번-휴무로 교대한다. 쉬는 게 업무의 일환이다. 쉴 때 위급 상황을 보면 나서야 한다는 법적 근거도 없다. 주차장 뺑소니 사고를 배당받은 경찰이 악천후와 연차·비번을 핑계로 조사를 미루다 CCTV 증거가 삭제되자, 직무 태만으로 징계받은 선례는 있다.
경찰 채용 면접엔 “비번 날 범죄·사고 현장을 목격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단골 질문이 있다고 한다. 모범 답안은 “내 안전을 먼저 확인한 뒤, 증거를 조심스레 수집해 본부에 보고한다.” 보호·진압·구조 장비 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남을 돕겠다고 나서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란 얘기다.
비행기에서 위급 환자가 생길 때 승객 중 의료진을 찾는 닥터콜(Doctor Call)도 복잡한 문제다. 의사들에 따르면, 기내 닥터콜에 응하는 비율은 절반 정도라고 한다. 섣불리 나섰다 잘못되면 의료 분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닥터콜에 응해야 한다는 응급의료법상 의무는 있지만, 불이행 시 처벌 조항은 없다.
사람을 도울 의무나 양심에 대해선 나라마다 시각이 다르다. 프랑스·독일·덴마크 등 유럽에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모른 체 지나쳤을 때 처벌하는 형법, 즉 ‘착한 사마리아인법(法)’이 있다. 공직자·의료진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적용된다.
반면 자유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에선 도덕을 강제하는 법은 상상할 수 없다. 심지어 미 경찰과 소방관은 휴일에 “나 오늘 비번이야, 당신 목숨은 알아서 챙겨”란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한다. 시민들은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고 공짜 음식을 내준다. 박봉의 경찰들이 비번 날 사설 경호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게 허용하는 주도 있다.
한국에선 제복 입은 경찰·군인 등 공권력을 우습게 보거나 불편해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사복으로 위장해서라도 사명을 다해 고군분투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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