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 얼굴을 공개하마”… 사적 응징에 환호하는 사람들

김아진 기자 2024. 1. 27.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사적 제재는 불법인데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

“불륜남, 불륜녀가 죄의식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 제가 반드시 바꾸겠습니다!!!”

출마 선언문인가 싶지만 아니다. 한 여성이 상간녀와 재판을 이어가다 췌장암으로 사망하자, 어느 유튜버가 상간녀 신상을 공개하면서 한 말이다. “당신처럼 뻔뻔한 사람은 100배, 1000배 고통을 돌려받아야 해.” 비장함을 넘어 영웅심까지 느껴진다. 상간녀 얼굴은 박제됐고 이 영상은 300만 조회 수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이 유튜버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면 처벌받겠다고 했다. 공익(?) 차원이니까 영상에 광고는 넣지 않겠다면서.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3000원부터 10만원까지 엄청난 액수의 후원금을 쐈다. “이런 게 정의 구현이지.” “국가가 못 한 일을 해냈네요.” 다섯 살배기 아들을 키우다 세상을 떠난 이 여성의 삶은 기구했다. 췌장암 판정을 받은 뒤 남편의 불륜을 알고 이혼하는 과정에서 2년간 상간녀 소송을 해 승소했지만 상간녀가 항소했고, 다시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

유튜버가 상간녀라고 주장하는 여성의 나이 등을 공개하며 “극악무도하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유튜브

정말 안타까운 사연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개인이 적법 절차 없이 누군가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엄연한 불법이다. 엉뚱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 특히 일부 유튜버, 인플루언서가 돈벌이에 신상 공개를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대중은 열광한다.

사적 제재, 사적 보복이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서 활개 치고 있다. 한 유튜버는 자신이 볼 때 ‘진짜 나쁜x’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신상을 공개하고 있다. 부산 돌려차기남, 강남 마약 롤스로이스 뺑소니 가해자, 50억원대 전세 사기 부부에 이어 최근엔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배우 이선균과 관련한 협박범까지. 이 유튜버는 부산 돌려차기남의 이름, 생년월일, 직업, 출생지, 키, 전과기록까지 공개한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면서도 “충분히 무모했고 올바르지 못했다”고 했다.

유튜버가 50억원대 전세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부부의 신상을 폭로하고 있다./유튜브

하지만 이후에도 신상 공개를 이어갔다. 대전 등에서 약 50억원 규모의 전세 사기를 치고 미국으로 도주해 호화 생활을 한다며 부부 신상을 공개하는 영상에선 “이런 게 바로 ‘사적 제재’다. 이 멍청이들아!”라고 했다. 롤스로이스 뺑소니 가해자에게 마약성 약물을 투약한 의사와 관련한 영상을 올리면서는 “x 같은 법”이라고도 했다. 배우 이선균이 사망한 직후엔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을 다뤄왔지만 인류애가 떨어질 만큼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저의 관점은 너무나 비통하다”며 협박녀로 지목된 여성의 신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는 거의 다 유료 광고가 포함돼 있다. 영상으로 구독자, 조회 수를 늘리고 돈을 번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결국 돈이 목적이냐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이 유튜버는 이런 비판에도 “월급 1000만원 받는다. 세금 내고 하면 실수령 800만원쯤”이라고 했다. 이 유튜버 지지자들은 “볼 때마다 속이 시원하다. 검경뿐 아니라 언론도 보고 느껴라” “출마하시라” “신상 공개로 구속되면 구독자 130만명이 가서 석방 집회 열겠다” 등의 글을 쏟아냈다.

유튜버가 60대 경비원을 폭행한 10대 남학생을 만나 무릎을 꿇리고 혼내고 있다./유튜브

최근 경기 남양주에서 10대 남학생 A군이 60대 경비원을 무차별 폭행하는 동영상이 나돌아 공분을 샀다. 이후 지인 사이인 유튜버와 BJ는 “할아버지 폭행범 잡아 참교육했다”는 내용의 영상을 올렸다. 영상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은 A군이 무릎을 꿇고 이들에게 쌍욕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 “저도 깨끗하게 산 건 아니지만,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잡았다고 생각해 주세요.” A군은 100만원을 받고 다른 유튜브 채널에도 출연할 것이란 말도 한다. 여기서도 돈이 빠지지 않는다. 댓글엔 “경찰도 못 하는 일을 하다니 통쾌함을 느낀다” “속이 후련하다”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그러나 막장 콘텐츠로 돈을 번 이들이 또 조회 수로 돈 벌려고 별짓을 다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 밖에도 유튜브 등에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과 관련한 신상 공개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입법 기관인 국회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진다. 민주당 서영교 최고위원이 이재명 대표를 습격한 김모(67)씨의 실명과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얼굴 사진을 회의 도중 공개한 것. 그는 “이미 사진이 (여러 곳에서) 다 나왔다”고 했다. 당대표에 대한 충성심이 앞선 결심이었는지는 몰라도 명백한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경찰도 검토 끝에 김씨의 신상 공개를 하지 않기로 했다. 논란이 되자, 민주당은 해당 회의 영상을 자신들의 유튜브 채널인 ‘델리민주’에서 삭제했다.

민주당 서영교 의원이 국회에서 이재명 대표를 공격한 김모씨 얼굴을 공개하고 있다./인스타그램

현행법상 살인·살인미수, 성폭력 등 강력 범죄 피의자의 경우 신상을 공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범행이 잔인하고 피해가 중대한 경우,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을 만한 증거가 충분한 경우, 국민 알 권리 보장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등이 공개 사유다. 시신을 토막 내 훼손한 살인범 정유정·고유정, 관악구 등산로 살인마 최윤종 등이 이에 따라 신상이 공개됐다. 2010년 신상 공개 제도 도입 이후 경찰이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 건 50건 정도. 피해자 입장에서 극악무도한 살인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만, 피의자 얼굴 공개는 그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적 제재에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법을 통한 단죄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피해자가 기대하는 수준보다 가해자가 훨씬 약한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제재는 불법이다. 분노·혐오의 악순환을 낳고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정보통신망법 70조에 따르면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에 사실 혹은 거짓을 게재하면 3~7년 이하의 징역과 3000만~5000만원 이하의 벌금 등에 처한다. 경찰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 등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타인의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행위는 일체 불법인 것이다.

대법원도 이러한 이유로 얼마 전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한 인터넷 사이트 ‘배드파더스(Bad Fathers·나쁜 아빠들)’ 운영자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이 사이트 운영자는 2019년 5월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라고 제보를 받은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포함한 신상 정보를 공개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무죄로 봤지만 2심은 ‘사적 제재’로 현행법에 어긋난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다만 왜 사적 보복에 적지 않은 대중이 환호하는지 고민이 필요한 때다. 해외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우리나라 법이 피의자를 과잉 보호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남자 친구에게 칼로 190차례 난도질당해 사망한 여성의 사연이 알려졌다. 결혼하기로 한 애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당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인터넷에선 “170년형이 아니고 17년형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N번방 조주빈도 42년형을 받았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이 여성의 부모는 최근 언론에 죽은 딸의 얼굴 사진을 건네며 오열했다. “범죄자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니 딸 얼굴이라도 공개해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제발 제 딸의 억울한 죽음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