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포기 마, 디즈니 만화처럼 소원이 이뤄질 거야
소원성취기관부터 기업까지
환아의 꿈 들어주는 어른들
“어제 사인 연습도 했어요. 한 10분?”
지난 20일 인천 송도 메가박스 마술극장에서 특별한 팬미팅이 열렸다. 주인공 윤시원(12)양이 디즈니 100주년 애니메이션 ‘위시(Wish)’ 주제곡 ‘나는 별이야’를 멋지게 완창하자, 자리에 모인 가족 및 이웃사촌 10여 명이 열띤 환호를 보냈다. 윤양은 3년 전 발병한 뇌종양을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다. 소원은 가수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그 꿈을 이룰 것이다.
소녀를 응원하기 위해 저작권 관리 까다롭기로 유명한 디즈니 본사가 힘을 보탰다. 이례적으로 100주년 영화 사운드트랙 음원을 제공하고, 특별 영화 상영회를 마련했다. 판매용은 아니지만 음반도 제작돼 이날 처음 공개됐다. 윤양은 “내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니까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애 첫 음반 위에 전날 연습한 사인을 하며 팬들에게 건넸다.
◇만화 영화처럼, 꿈이 현실로
“처음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윤양의 모친은 말했다. 눈가를 훔쳤다. 자신도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을 딸이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1년 병원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았다. “서울대어린이병원에 쉼터가 있는데요, 거기서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를 봤어요.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라는 단체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난치병 환아(患兒)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 성취 기관’이었다. 윤양의 모친도 담당의(醫) 추천서와 함께 바람을 적어 보냈다. 딸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지난해 2월 연락이 왔다. 들어주겠다고.
윤양은 창립 22주년을 맞는 메이크어위시 재단 한국 지부의 올해 열 두번 째 소원 성취 아동이다. 신청서를 검토해 담당 디자이너와 자원봉사자 5명이 팀을 꾸렸다. 아이의 ‘진정한 소망’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화상으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원래 윤양은 가수 이병찬을 만나고 싶어했다. 투병 중 그의 노래를 들으며 힘을 냈다고 한다. 여건상 만남이 불발됐다. 그다음 꿈은 ‘디즈니랜드’에 가보는 것이었다. 마침 디즈니 측에서 창사 100주년을 맞아 캠페인 협력을 제안했다. 재단 측은 “디즈니 만화를 좋아하고 가수를 꿈꾸는 아이가 있다”며 합동 작전을 의논했다. 윤양의 목소리가 점점 구체화됐다.
약 1년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지난 5일 서울 마포의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이 진행됐다. 애니메이션 ‘위시’의 주인공 성우를 맡은 뮤지컬 배우 유주혜(36)씨가 이날 녹음을 위해 특별 가이드를 맡았다. 대학생 봉사단 김민주(23)씨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과정이 어른으로서 너무 뿌듯했다”고 말했다.
‘위시’는 한 소녀가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려 동분서주하는 이야기이고, 윤양이 부른 주제곡 ‘나는 별이야’ 역시 그 의미를 관통한다. “궁금하지 않니, 왜 하늘을 보며 다 찾는지… 더 이상 안 찾아도 돼, 답은 여기 있으니까.” 윤양은 훗날 어른이 되면 메이크어위시 봉사단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얘들아, 너희들도 나처럼 멋진 소원 이룰 수 있을 거야. 건강하자!”
◇“무조건적인 사랑에 고마워 울었다”
일곱 살짜리 미국 소년 크리스의 소원은 경찰이 되는 것이었다.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1980년 애리조나주(州) 경찰청은 소년을 명예 경찰관으로 임명했다. 덕분에 제복을 입고 경찰 헬기로 범인 검거 체험까지 할 수 있었다. 생애 최고의 날을 보낸 크리스는 사흘 뒤 “하늘나라에서 엄마를 지켜줄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영면했다.
그해 크리스의 엄마 린다 폴링, 당시 경찰관이던 프랭크 샹크비츠는 난치병 아동의 소원을 이뤄주는 단체를 설립했다. ‘메이크어위시 재단’이다. 전 세계 40국으로 지부를 확장했고,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지난해 1000만달러(약 134억원)를 기부하는 등 유명인의 참여도 활발하다. 2002년 설립된 한국 지부는 국내외 파트너십을 통해 지금껏 5430명의 소원을 현실화했다.
소원은 가지각색이다. 가수 윤하의 라디오를 들으며 투병했던 남학생을 위해 윤하의 깜짝 콘서트를 주선한 대형 기획부터 항암 치료 중인 소녀의 집을 공주풍으로 꾸며주는 소소한 이벤트까지. 보호자에게도 큰 선물이다. 백혈병 투병 중 꿈에 그리던 유명 IT 유튜버 눈쟁이와의 만남을 이룬 한 소년의 부모가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날 아이 어깨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그 뒷모습에 저는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전교 1등을 하거나, 대단한 영재여서가 아니라 그냥 아팠기 때문에 받은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우리 가족 빼고 이 세상 모두가 행복하고 잘사는 것 같아 병원에서 혼자 서러웠던 기억이 다 사라지는 치유의 시간이었습니다.”
◇환아 위해 수작업으로 만든 ‘고래밥’
모든 건 관심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부산대어린이병원 소아집중치료실에서 근무하는 최다정(25) 간호사는 심장 질환으로 입원해 있던 네 살짜리 아이의 소원을 전해들었다. 전담 환자는 아니었다. 오며 가며 안부를 주고받던 아이. 과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딸기 고래밥’. 하지만 2년 전 단종된 상품이었다.
“검사 수치가 안 좋아서 며칠 동안 금식을 해야 했거든요. 엄마도 없이 오랜 시간 병원에 있으면 기분이 처지니까, 과자라도 먹으면 좋아지지 않겠나 싶어서….” 최 간호사는 과자 회사 오리온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딸기 고래밥’을 구할 수 없겠냐고.
사연을 전달받은 오리온 고객센터 김보영 차장은 곧장 개발팀에 문의를 넣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진행’이 결정됐다. 이튿날 연구원 세 명이 투입됐다. 원료를 다시 구입하고 ‘수작업’으로 과자를 만들었다. 제작 수량은 적었지만 “아이가 기뻐할 생각에” 일과 시간 이후까지 시간을 쏟아부었다. 환아를 위한 과자인 만큼 특별히 미생물 검사까지 진행했다. 일주일 뒤인 지난달 14일, 과자 상자가 병원에 도착했다. 박스를 열어본 아이는 “과자다!”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김 차장은 “아이가 과자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간병은 때로 가정을 파괴할 정도로 혹독하다. 현실적인 난관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난 8일 블로그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백혈병 아이들은 음식 조절도 해야 하고, 평상시 먹는 음식도 감염 위험이 있어 다 살균 소독을 해야 한다. 진공 포장 제품만 먹어야 하는데, 개봉 후 2시간이 지나면 먹을 수가 없다. 우리 아이는 ‘코코볼’과 ‘콘푸라이트’를 너무 좋아하는데 대용량만 있고 심지어 항암을 하니 많이 먹지도 못해 남은 과자는 오롯이 가족의 몫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대용량은 감당하기 어려워 혹시나 하고 작년 2월 28일 동서식품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했다. 혹시 (소용량) 컵 제품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지….”
그리고 지난 4일 ‘코코볼컵’ 신제품과 함께 동서식품 측이 보낸 편지가 아이의 집에 도착했다. “아픈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갑진년 새해에는 꼭 쾌차해 세상의 다양한 음식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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