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다’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오지윤의 리빙뽀인뜨] 부러움
고백하건대, ‘부럽다’는 말을 자주 쓴다. 집을 샀다는 친구, 주식이 대박 났다는 친구, 팀장이 되었다는 친구, 아픈 곳이 전혀 없다는 친구, 오랫동안 여행을 간다는 친구, 이직을 한다는 친구, 임신을 했다는 친구. 좋은 일이 있는 친구와 나쁜 일이 없는 친구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은 더 많은 경우의 수를 향해 흩어진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향해 나는 열심히 ‘부럽다’는 말을 건네며 살아왔다. 이 말이 친구를 더 기쁘게 한다는 믿음도 있다.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에 아주 잠깐 우월감이 스쳐가는 것을 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 ‘부럽다’란 가장 격렬하고 솔직한 축하 멘트인 것이다.
하지만 말의 힘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부럽다’는 ‘상대방의 우월한 점을 가지고 싶어함’이란 뜻이다. 내가 국어사전을 달달 외우면서 말하는 것도 아닌데 모국어의 힘이란 참 무섭지. 단어를 쓰면 쓸수록 몸과 마음에 의미가 배어든다. ‘부럽다’는 말에는 저절로 나의 ‘열등함’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상황이 열등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 반복하는 꼴이니, 쓰면 쓸수록 마음이 축나고 만다.
나도 모르게 ‘부럽다’는 말을 한 날, 친한 언니가 내게 말했다. “너는 ‘부럽다’는 말을 참 많이 해. 세상에 참 부러운 것도 많다.” 무심한 듯 마음 쓴 조언을 듣고 집에 오는 길에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오늘 진짜로 ‘부러움’을 느꼈던 걸까? 그 친구가 선택한 삶을 살고 싶은가? 진지하게 물었다. 대답은 ‘아니오’였다. 분명 탐스러운 소식이었지만, 지금 내게 정말 필요한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솔직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부럽다’라는 말도 내가 솔직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부럽다’라는 말은 스스로 허영심을 부추기는 말이었던 것 같다. 친구를 축하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그치는 말에 가까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가지 않는 길에 대해 쓸데없이 다그치는 말. 지금 이렇게 활자로 내 마음을 파헤치고 있으니, 속이 다 편안해진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 S와 긴 통화를 했다. S는 어쩌면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뭐든 시작할 때 돌다리를 수십 번 두드리고 건너는 신중한 친구다. 새로운 일을 잘 벌이지 않고 가진 것에만 집중하는 친구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고, 하지 못하게 되어도 언젠가 하고 만다. 결국 그녀는 올해 같은 분야의 다른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했고, 나는 광고 회사 일을 하면서 영화 연출 대학원에 들어갔다.
“언니는 진짜 대단해. 열정이 넘치나봐.”
“난 네가 부러워. 삶이 심플하고 차분하잖아.”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만 난 내가 좋아.”
“나도. 사실, 내가 좋아. 난 그렇게 못 살아.”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손이 시려도 전화를 끊지 못했던 밤. 나의 한마디에 똑같은 고백을 메아리처럼 들려준 친구의 대답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대화에 스스로 감탄했다. 이렇게 멋진 대화를 하다니.
며칠 전 친한 후배가 방송국에서 입봉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습관처럼 “부럽다”는 말을 할 뻔했다가, “멋지다” “잘할 거다”라는 다른 진심들만 체로 걸러 전했다. 그녀의 기쁨이 내 몸까지 온전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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