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다 남은 약 그냥 버리면 큰일 난다는데… 대체 어디다 버려요?
폐의약품 안 받는 약국들 속사정 들어보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은 한 연구소에서 100병이 넘는 발암 물질 ‘포름알데히드’가 하수구에 버려져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야기다. 버려진 약을 먹은 물고기가 ‘괴물’이 되어 한강 변에 있는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한다.
1300만명이나 이 괴물을 본 탓일까. ‘싱크대와 쓰레기통에 폐의약품을 함부로 버리면 큰일 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강물을 떠 조사해 보니 항생제를 비롯한 약 성분이 검출되면서 공포감은 더 커졌다. 2009년 환경부와 대한약사회는 먹다 남은 약을 약국에 버리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른바 ‘묵힌 약 제자리 찾기’ 캠페인이다.
약을 버리려 약국을 찾는 발길은 꾸준히 늘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약국에서 폐의약품을 두고 실랑이가 벌어진다. 약을 버려 달라는 시민과 “이제 폐의약품을 받지 않으니 도로 가져가라”는 약사 사이에서 설전이 벌어진다는 것.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한 약사는 “먹다 남은 약을 제대로 분류하지 않고 다른 쓰레기랑 섞어 약국에 툭 던지고 가는 분들이 적지 않다”며 “약사도 사람이다 보니 불쾌하다”고 말했다.
◇폐의약품 두고 약국 곳곳서 실랑이
어찌 된 일일까. 약사들은 “폐의약품을 버리는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다른 약국은 “그간 약사회가 협조해서 폐의약품을 받아왔는데, 지자체마다 수거 방침이 제각각이다 보니 갈등이 생긴다”고 했다. 설계된 시스템대로라면 약국이 수거해 보관한 폐의약품을 지자체에서 가져가 소각하는데, 지자체에서 2~3달 동안 찾아오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폐의약품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것도 성가신데 제때 가져가지 않다 보니 약사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결국 2021년 서울시 약사회는 서울시 측에 “더는 약국에서 폐의약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약사회 방침과 무관하게 지자체별 방침에 따라 아직 폐의약품을 수거하는 곳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시민들의 불편과 혼란이다. 정부와 지자체의 큰 방향은 ‘보건소나 주민센터, 복지관, 약국 등에 설치된 폐의약품 수거함에 먹다 남은 약을 버려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 반응은 시큰둥하다. “수거함이 어디 있는지 알기 어렵고, 굳이 남은 약을 버리기 위해 주민센터나 보건소까지 가야 하는 게 불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60대 시민은 “폐의약품 수거함을 설치한다길래 물어보니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없다’고 하더라”며 “폐의약품이 문제라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 폐의약품 수거함을 두면 될 텐데, 보건소나 주민센터까지 오라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과 세종시, 나주시는 우정사업본부와 협력해 먹다 남은 약을 우체통에 버리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약국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들이 편하게 폐의약품을 버리게 하겠다는 취지다. 효과는 꽤 있었다. 작년부터 우체통 시스템을 도입한 서울시의 경우 그해 7~9월 폐의약품 수거량이 월 평균 15.6톤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32% 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우체통의 경우 물약은 폐기할 수 없다는 것. 물약을 버렸다가 우체통에서 터지기라도 하면 우편물이 몽땅 훼손되기 때문이다. 한 약사는 “특정한 약은 수거할 수 없다는 게 시민들 입장에선 번거로움을 또 만드는 것”이라며 “우체통으로 폐의약품을 수거하는 게 우편물이 줄어든 우정사업본부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만든 사업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변기·싱크대에 버리지 말고, 항생제·피임약 특히 유의
우체통이나 수거함에 버려진 폐의약품은 전부 소각한다. 땅에 매립하거나 강물에 흘려보내면 토양과 물을 심각하게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항생제 등 일부 약품은 생태계를 교란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박테리아 등이 생성돼 치명적 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다. 피임약을 함부로 버려 생태계 번식이 억제되는 현상이 관측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지자체별로 제각각인 폐의약품 처리를 단순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홍수열 자연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현재 생활 폐기물 대부분은 매립하지 않고 소각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 쓰레기를 전량 소각하는 곳은 일반 쓰레기 봉투에 폐의약품을 버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번잡하게 폐의약품을 수거하기보다 폐의약품을 절대 싱크대나 변기 등에 버리지 않기 등 간명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수거 방식도 단순하고 편리하게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폐기 시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문제가 되는 약품의 경우 제약사에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약업계 관계자는 “폐의약품 전체가 무조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라며 “폐기 시 문제가 될 수 있는 의약품은 생산자에게 폐기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홍수열 소장도 “그런 약들은 제약사들이 약국에 비용을 부담하고 폐기할 약을 모아서 처리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맑눈광’ 김아영, SNL 떠난다... “차근차근 저만의 길 만들 것”
- 트럼프 “우크라군 살려달라” 요청에...푸틴 “항복하면”
- 美 국립묘지도 ‘다양성 OUT’...흑인·여성·히스패닉 ‘홍보’ 정지
- 서울 곳곳 尹 탄핵 찬성 집회… 국회서 광화문까지 도보 행진
- “내란 사기극 끝내야” vs “윤석열 파면”…주말 집회에 달려간 與野의원들
- 세종대로 8차선 메운 ‘尹 탄핵 반대' 집회…구미서도 열려
- 털복숭이 붐 마이크로 입을 ‘퍽’… 4초간 노려본 트럼프 이후 반응은
- 서학개미 미국 주식 3개월 새 25조원 팔았다
- 오세훈, 헌재 인근 민주당 천막에 “변상금 부과 검토”
- 유정복 인천시장, “찢는 정치, 잇는 정치로 바꿔 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