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고 때리고 돈 떼먹고"…'슈퍼 갑질'이 낳은 반전 결말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4. 1. 27.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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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3대 거장(中)
괴팍한 '전투 교황'의 갑질
새우처럼 구부러진 허리
온갖 난관 뚫고 완성한 인류의 걸작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천장화'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속 아담 습작 스케치. /대영박물관


시스티나 천장화중 '아담의 창조'

“선생님, 제발요. 같이 가주세요.”

1506년 이탈리아 산골의 한 여관방에 다섯 명의 괴한이 들이닥쳤습니다. 강도로 착각할 만큼 인상은 험악하고 몸은 건장한 남자들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상대는 ‘그분’이라고요. 뒷일은 생각 안 해요?” “그분 성격 아시잖아요. 선생님 다시 못 데려가면 저희가 죽어요.” 하지만 앉아 있던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돈 떼먹고, 문전박대하고, 욕하고, 때리려고?” 빈정거리는 그 사람, 미켈란젤로(1475~1564)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교황이 보낸 추적자들. 교황의 ‘슈퍼 갑질’을 견디다 못해 도망간 미켈란젤로를 다시 잡아 오라는 명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강제로 모셔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추적자들은 미켈란젤로를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쉽게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출발해 중간중간 말을 갈아타 가며 밤새 달린 것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잡아가 봐. 여기는 로마가 아니라 피렌체 공국 땅이야. 교황 땅이 아니라고. 당장 외교 문제가 될걸?”

추적자들은 울상이 돼 돌아갔지만, 미켈란젤로의 표정은 착잡했습니다. ‘아…. 이거 어떡하냐. 교황 말인데 안 들을 수도 없고….’ 대체 왜 미켈란젤로는 당시 서양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교황과 대판 싸우고 쫓기는 몸이 됐을까요. 미켈란젤로와 당시 교황, 그리고 ‘천지창조’로 잘 알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역작 시스티나 천장화(畵)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지난 기사인 <“죽도록 싫었다”…‘세계 최고 천재’가 혐오한 20대 男의 정체>(1월 20일자)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악덕 거래처’…‘전투 교황’ 갑질에 당했다

'아담의 창조'와 그 주변 그림들.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들의 제작 과정을 이야기하려면 이 작업을 맡긴 ‘발주처’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사를 맡긴 인물, 즉 발주처 사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사 교황’ ‘전투 교황’ ‘무서운 교황’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교황 율리오 2세(1443~1513)였거든요.

율리오 2세는 화끈했습니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그는 머리가 좋고 체력도 뛰어난 데다 야심도 커서, 교황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전쟁을 비롯해 큰 일들을 많이 벌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본거지인 바티칸의 모습을 뜯어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술과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대규모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고, 예술 작품들을 사들이며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한편 그는 충동적이고 절제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생활은 ‘막장’이었습니다. 성직자, 그것도 교황이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해서 성병에 걸렸고, 온갖 좋은 음식과 술을 밤낮으로 먹고 마셔서 통풍에 걸릴 정도였지요. 하지만 주변 사람을 가장 괴롭게 했던 건 불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화가 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욕하며 지팡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교황 성하 옆에 갈 때는 갑옷을 입고 가야 한다.”

한스 부르크마이어가 율리오 2세를 묘사한 목판화. 강력한 카리스마와 불같은 성격이 드러나 있다.

율리오 2세의 성격이 어찌나 더러웠던지 베네치아에서 온 외교관은 교황을 접견하다가 신경쇠약에 걸려버렸습니다. 스페인에서 온 외교관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발렌시아 지역 정신병원에 가면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을 백 명은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보다 교황 성하가 더 미쳤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도 만만찮게 성격이 더러운 인물. 교황과 천재 예술가, 두 괴팍한 거물들의 애증 섞인 관계는 인류 예술 역사에 남을 거대한 걸작을 만들게 됩니다.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린 미켈란젤로의 초상화(154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둘의 악연이 시작된 건 미켈란젤로가 서른 살이던 1505년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지난 몇 년 새 역작인 ‘피에타’와 ‘다비드상’을 완성해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바티칸에서 여러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네.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자네가 맡아 줘야겠어. 내가 죽으면 묻힐 거대한 무덤을 짓고, 그 안을 아름다운 조각들로 가득 채워 주게. 대리석은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써도 좋네.

“이건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길 일생일대의 기회다.” ‘초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된 미켈란젤로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당장 짐을 싸서 대리석 원산지(이탈리아 카라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리석을 골라 바티칸으로 보냈고, 조각을 구상하며 8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요즘 산 전체를 조각하는 꿈을 꾼다”고 적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칠 무대를 만난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기뻤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바티칸에 배달된 대리석을 본 교황은 더 기뻐했습니다. ‘걸작이 나오겠군.’ 교황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려고 자신의 궁전과 미켈란젤로의 공방을 직통으로 잇는 길까지 뚫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바티칸에서도 최고 권위의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이 1000년 넘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기 시작한 겁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무너지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게다가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은, 자신의 묘지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멋진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꽂혀버린 교황은 결국 모든 예산을 끌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에게 맡긴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되고, 관련한 비용 지급도 중지됐습니다. 문제는 당사자인 미켈란젤로가 별다른 연락을 못 받았다는 겁니다.

율리오 2세의 무덤(1505~1545). 율리오 2세의 무덤은 원래 수없이 많은 조각과 청동 조형물이 포함된 거대한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이처럼 높이 2.35m의 기념물로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배송비가 밀렸어요.” 대리석 배송 업자의 독촉을 받은 후에야 미켈란젤로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장 교황청으로 쳐들어간 미켈란젤로. 마침 교황은 만찬 중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교황 성하. 돈 좀 주세요. 그건 그렇고, 우리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지만 교황의 답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어, 다른 사업을 시작했는데 거기에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 내가 맡긴 건은 이제 끝났어.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지금 밥 먹고 있잖아. 돈은 내일 다시 와서 얘기하세.” 전형적인 갑질이었지요.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미켈란젤로는 일단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교황청을 찾았지요. 하지만 이번엔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내일 오시랍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미켈란젤로는 교황청을 찾아가 문전박대당하기를 반복했습니다. 5일째, 마침내 폭발한 미켈란젤로는 문지기에게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습니다. “교황 성하께 이 한마디만 전해주게. 앞으로 내가 아무리 필요한 일이 있어도, 로마에서 날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제자를 시켜 공방의 물건을 전부 다 팔아버리도록 한 뒤, 밤새도록 말을 달려 피렌체로 도망쳤습니다. 곳곳에 심은 첩자들을 통해 이 일을 보고받은 교황은 즉시 추격자 다섯 명을 보내 미켈란젤로를 쫓아가라고 명했습니다. “당장 잡아 와!” 하지만 기사 첫 부분에 나와 있듯이, 미켈란젤로를 끌고 오는 임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최악의 중노동’ 떠맡다

‘이 녀석이 정말 단단히 삐졌구먼. 귀찮게 됐어. 그래도 곧 돌아오겠지.’ 교황은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일개 예술가가 교황의 말을 거역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벌써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돌아오면 맡길 다음 일을 생각해두고 있었습니다. 최근 금이 가서 떨어져 나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그림을 다시 칠하는 프로젝트였지요. 이곳은 교황의 주요 활동 장소이자 교황 선출 투표(콘클라베)가 열리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의 본래 모습. 위에는 밝고 푸른 바탕색에 황금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당이 튼튼하지 못한 지반 위에 세워지는 바람에, 예배당 남쪽 벽이 바깥으로 기울면서 천장의 균열이 생겨났다. 바티칸의 건축가는 천장 벽돌과 마룻바닥에 수십개의 쇠막대를 박아 넣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천장 그림은 다시 그려야 했다. 교황은 이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교황은 계속 미켈란젤로에게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심술을 부려서 내 곁을 떠난 미켈란젤로여. 천재들은 가끔 그렇게 변덕을 부리는 법이지. 내가 화가 났을까 봐 겁이 난다면, 걱정하지 말고 돌아오게나. 다치거나 해코지를 당하는 일 없이 전처럼 은총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자네가 할 일도 있네.” 요약하면 “안 죽인다”는 건데, 성격 나쁜 율리오 2세치고는 상당한 특별 대우였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결국 교황은 최후의 수단을 씁니다. 피렌체 정부에 정치적인 압력을 넣어 미켈란젤로를 사실상 반강제로 송환시킨 겁니다.

끌려오다시피 돌아온 미켈란젤로. 사실 따져보면 미켈란젤로의 행동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교황의 명령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공공연히 교황을 모욕했으니까요. 교황에게 간 미켈란젤로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교황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진작 왔어야지. 대체 뭘 믿고 지금까지 버틴 거냐? 내가 너를 찾아가서 빌기라도 할 것 같았냐!”

예언자 예레미아. 고뇌에 잠긴 예레미아의 모습을 화가의 자화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다행히도 교황 옆에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주교 한 명이 있었습니다. 화가 난 교황이 미켈란젤로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주교는 교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웃으며 말했습니다. “성하. 예술가라는 놈들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예술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작자들이지요. 교황 성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교황.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가 어째? 야 이 마귀 같은 놈아. 멍청한 건 너야!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여봐라. 이놈을 끌어내라!” 비록 성격은 최악이었지만, 예술적 소양이 깊고 마음속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존중했던 교황의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후 조금 민망해진 교황은 어찌어찌 미켈란젤로를 용서했습니다. 말을 꺼낸 불쌍한 주교는 난데없이 경비병들에게 붙들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야 했지만요.

어쨌거나 관계가 회복됐으니, 미켈란젤로에게 정식으로 일을 맡길 차례입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려 주게.”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거부했습니다. 자신을 조각가라고 생각했던 미켈란젤로에게 그림은 전공 분야가 아니었고, 성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별 볼 일 없는 미술가들이나 하는 일이었던 데다, 프레스코화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고난도의 중노동이었거든요.

'타락과 낙원에서의 추방' 장면.

프레스코(Fresco)는 축축하게 젖은 석고 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입니다.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은 기법인데, 미켈란젤로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에 특히 유행했었지요. 하지만 프레스코화를 제대로 그리는 건 정말 어려운 기술이었습니다. ‘곤경에 빠지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표현(Stare fresco)에도 프레스코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프레스코화는 다른 그림과 달리 ‘시간 제한’이 있었습니다. 작업에 착수한 뒤 20시간 내로 정해진 부분의 그림을 마쳐야 했지요. 그 후에는 석고가 굳어버려서 그림을 더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레스코 화가 중에서는 그림을 빨리 그리기 위해 붓을 양손에 들고 그리는 기술을 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그림을 고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나무나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실수해도 그냥 그 위에 덧칠하면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성한 프레스코화에서 실수를 발견하면 해당 부분의 석고를 통째로 뜯어낸 후 새로 그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나마 벽화는 앞을 보며 평평한 면에 그리기라도 하지요. 천장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건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계속 위를 보며 작업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당시 유명한 프레스코화 전문가 대부분은 몸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끔찍한 허리 통증과 시력 저하는 고질병이었고요.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14세기의 한 화가는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가 30미터 아래로 추락했다고 합니다.

'홍수'장면. 미켈란젤로는 단순히 노아의 방주라는 주제를 그리기보다는 인물들의 공포와 고뇌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그린 사람 중 살아남는 사람은 노아와 몇몇 인물뿐.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장면의 극적인 강렬함이 증폭된다.

그림 자체의 기술적인 난도도 극히 높았습니다. 평범하게 눈앞에 걸린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기술과, 멀리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기술은 아주 다르겠지요. 게다가 당시 성당 건물의 천장 대부분은 둥근 곡면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림을 효과적으로 그리려면 고도의 기술은 물론 많은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교황이 하라면 해야지.

 위장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고

시스티나 천장화 전체.


시스티나 천장의 그림 요소 계획도. 예수님의 조상들/노아의 이야기/아담과 이브의 창조 및 낙원에서의 추방/창조/예언자와 여선지자들로 치밀하게 구성돼 있다.

미켈란젤로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 일을 맡긴 거야? 여기엔 뭔가 음모가 있을 거야. 그래. 내 실력을 질투하는 녀석들이 벌인 짓이구먼. 화가도 아니고 천장화 경험이 전혀 없는 나한테 어려운 일을 맡겨서 실패하게 한 다음에, 망신을 주고 끌어내리려는 거야.’ 미켈란젤로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분명히 엄청나게 잘 해낼 수 있다. 반드시 그에게 맡겨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건 교황이었거든요.

‘질투하는 녀석들 뜻대로 되게 할 순 없지. 누구보다도 멋진 그림을 완성해 주마. 나보다 먼저 여기 프레스코를 그린 사람들이 내 그림 앞에 무릎을 꿇게 해주마.’ 미켈란젤로는 다짐했습니다. 뒤틀린 성격이 낳은 오해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투지를 불태우게 됐습니다. 1508년 5월, 작업은 높이 최대 40m에 달하는 발판 구조물을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자신도 몰랐습니다. 자기가 만든 발판에서 앞으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요.

미켈란젤로의 앞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중 최악은 육체적인 고통. 기형적인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계속 위로 눈을 치켜뜨고 그림을 그리느라 눈도 성치 못했습니다. 이 시기, 미켈란젤로는 너무 오랫동안 위를 올려다본 나머지 자신의 눈높이 아래에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증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편지를 읽고 쓸 때도 항상 천장화 작업을 하듯 종이를 높이 들어올려야 했습니다. 이 밖에도 미켈란젤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편지 구석에 낙서하듯 그린, 자신이 천장화를 그리는 모습.

“이 기괴한 자세 때문에 나는 갑상샘종에 걸리고 말았네. 위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와 턱 밑에 걸려있는 듯하네. 턱수염은 하늘을 향해 있고, 목덜미는 등에 닿아있네. 위에서는 물감이 계속 흘러내려 내 얼굴은 물감 범벅이 되고 마네. 허리를 바짝 당겨 배가 불룩 나오고, 평형을 유지하느라 엉덩이는 말 엉덩이처럼 된다네. 그러면 다리는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해지지. 마치 활처럼 몸을 (뒤로) 구부리면 앞 가죽은 팽팽해지고 뒷 가죽은 쪼글쪼글해지지. 그러면 마음속에는 기괴하고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네. 나는 엉뚱한 곳에 와 있고, 사실 화가도 아니라네.”

자꾸만 빨리 완성하라고, 그게 안 되면 그림을 중간에 보여주기라도 하라고 졸라대는 교황도 속을 썩였습니다. 완성 전 작품을 공개하는 걸 극도로 꺼렸던 미켈란젤로지만, 교황이 “안 보여주면 그림 그릴 때 뒤에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데는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중간에 그림을 살짝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평생 투덜거렸지요. “끝까지 안 보여줬으면 훨씬 더 멋지게 완성할 수 있었는데.”

태양과 달의 창조 부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까지 대부분 작품에서 신은 젊은 남성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이처럼 신을 수염 난 노인 남성으로 묘사한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그를 따라하면서 '신=노인 남성으로 표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됐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봐, 도대체 언제 작업을 다 마칠 수 있다는 거야?” 여느 때처럼 교황이 물었습니다. 안 그래도 피로와 스트레스로 미칠 지경이었던 미켈란젤로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습니다. “아, 끝날 만할 때 끝나겠죠.” 그 말을 듣고 이성을 잃은 교황은 지팡이를 들어 미켈란젤로를 내리치며 말했습니다. “뭐? 끝날 만할 때? 끝날 만할 때?”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미켈란젤로가 아니지요. 바로 집에 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교황은 바로 심부름꾼을 보내 사과의 말과 함께 ‘특별 상여금’을 지급했습니다. ‘금융 치료’ 덕분에 미켈란젤로의 작업은 재개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천재는 천재였습니다.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미켈란젤로는 무서운 속도로 작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프레스코화 실력과 작업 속도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좋아졌지요. 미켈란젤로답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 속 인물을 경멸적으로 묘사하거나 손가락으로 욕하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다만 사진기나 망원경 같은 게 없는 시대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의 눈으로는 그런 요소들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천장화 일부. 왼쪽에서 뻗어나와있는 손이 'Fig sign'이라 불리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이 손모양은 상대방을 모욕하는 의미로 쓰인다.

 신들의 언어

아래에서 올려다본 시스티나 천장화. Getty Images Bank

1512년 11월 1일. 마침내 완성된 시스티나 천장화가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예배당의 둥근 천장을 꽉 채운 거대한 작품들을 올려다본 관람객들은 숨이 턱 막혔습니다. 결코 한눈에 담을 수 없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그 모양과 색채의 물결. 폭력이나 공포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강력하게 소용돌이치는 경이로운 에너지의 파동.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류 역사상 최고 역작 중 하나가 저 높은 곳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품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천재 미켈란젤로에게 관람객들은 아낌없는 찬사와 경의를 보냈습니다. 후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중에는 렘브란트, 루벤스, 카미유 피사로 등 수많은 거장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일종의 교과서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 수석 궁정 화가이자 왕립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이었던 조슈아 레이놀즈는 학생들에게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신들의 언어와도 같으니 반드시 필사하라”고 권하기도 했지요. 괴테는 말했습니다. “한 인간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알고 싶으면, 시스티나 성당을 보라.”

델포이의 여사제.

그 후 수백년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미사에서 피워올린 향초와 약초의 연기, 콘클라베 행사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연기, 난방과 대기오염이 천장화에 그을음을 입혔습니다. 지진을 비롯한 진동, 누적 수천만 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뿜어내는 숨결은 천장화 일부에 균열을 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그림이 주는 감동을 조금도 다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인류가 품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원형(原型)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장화가 완성된 후 불과 4개월 만에 율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난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신이 탄생에 일조한,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걸작을 그 짧은 시간밖에 즐기지 못했으니 말이지요. 미켈란젤로를 여러모로 힘들게 한 괴팍한 사람이었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던 그가 없었다면 시스티나 천장화도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라파엘로의 그림 율리오 2세의 초상(1511). 앞을 응시하는 교황 말년 얼굴에는 여전히 강한 의지가 배어나지만, 우묵 팬 눈언저리에는 우수가 깃들어 있다. 역사상 교황에게 이토록 가까이 다가가 내면을 들여다본 화가는 오직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뿐이었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어쨌거나, 미켈란젤로의 위상은 시스티나 천장화 이후 다른 모든 예술가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옛 라이벌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지난 9년 동안 단 두 점의 작품만을 완성한 데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를 비롯한 다른 대가들도 전성기가 한참 지났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고요.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라는 재능있는 젊은 화가가 나타났단 소식이 들려왔지만, 아직 그는 막 경력을 시작한 애송이에 불과했습니다.

당당하게 그의 앞에 자격을 갖추고 선 도전자는 이제 오직 한 명. 라파엘로였습니다.

시스티나 천장화 '아담의 탄생'의 손 부분 확대. 일부 학자들은 두 손이 조금 떨어져 있는 모양을 두고 '인간은 영원히 신처럼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 손 모양은 훗날 수많은 예술가들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모티브가 됐다.

*당초 상편과 하편 2부작으로 이번 편을 구상했지만, 르네상스 미술의 주인공 격인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다 보니 내용이 길어져 3부작으로 늘리게 됐습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넘어가기가 너무 아깝게 느껴졌네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싸움에 관한 내용은 다음 주 하편에서 다루겠습니다. 라파엘로 이야기를 기대하신 독자 여러분들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이번 기사는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로스 킹 지음, 신영화 옮김, 도토리하우스 펴냄)을 중심으로 Renaissance Rivals: Michelangelo, Leonardo, Raphael, Titian (Rana Goffen 지음), 미켈란젤로(질 네레 지음, 정은진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라파엘로(크리스토프 퇴네스 지음,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논문 ‘Raphael, Michelangelo, Sebastiano : High Renaissance Rivaly’(Robert S. Liebert)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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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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