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파생상품은 잘못이 없다
ELS 본질은 H지수 변동성
풋옵션 매도 고위험 상품
예금 대체상품 안내는 잘못
내부경고 있어도 묵살되는
금융사 인센티브 구조 바꿔야
이상은 사회부 차장
“내가 은행에 갔지, 카지노에 간 겁니까.”
원금 비보장형 파생상품인 주가연계증권(ELS)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어느 투자자가 관련 뉴스에 남긴 댓글이다. ELS 투자자 커뮤니티에는 “겨우 1~2% 금리 더 받으려고 원금을 다 날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글이 넘친다.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로 대규모 손실을 본 투자자들의 상황과 판박이다.
돈을 잃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심지어 나라가 5000만원까지 보장해 주는 은행 예금과 원금 100% 손실이 가능한 파생상품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대충 서명한 고객이라도 ELS와 예금을 혼동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손실에 대한 설명도 곳곳에 박혀 있다. 투자자는 이런 설명서를 보고도 막연히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의 판단이나 창구 직원의 권유에 의존해 위험을 받아들였다.
이번에 문제가 된 ELS와 앞서 문제가 된 DLF의 그래프는 비슷하다. 투자자가 약간의 수익을 보장받는 대신 일정 조건하에서 원금 100% 손실 가능성을 감내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풋옵션 매도에 베팅하는 고위험 상품이다.
특히 ELS 기초지수에 현재 손실의 원인을 제공한 홍콩H지수가 많이 포함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상품은 대개 지수 2~3개를 기초자산으로 삼았다. 보통 S&P500(미국), 유로스톡스50(유럽), 코스피200(한국), 닛케이225(일본), 홍콩H지수(중국) 중 선진국 지수 1~2개와 홍콩H지수를 엮는 식이다.
증권사 직원들은 “이 상품 수익률(금리)의 약 70%가 H지수에서 나왔다”고 한다. 변동성이 커야 거래 과정에서 수익이 발생하는데 다른 지수는 H지수만큼 변동성이 크지 않아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ELS 상품의 원금 손실 발생 조건을 따지는 기준은 가장 수익률이 나쁜 자산이다. 지난 10년 동안 5대 지수 가운데 수익률이 가장 나쁜 자산은 거의 항상 H지수였다. 결국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수십조원어치씩 팔린 ELS의 본질은 H지수 변동성에 베팅하는 것이었다. 2020~2021년 역사적 평균을 웃돌던 H지수가 금리 상승기에 50% 이하로 떨어져 손실 구간에 진입할 확률은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적은 돈은 몰라도 전세금이나 퇴직금을 넣고 할 만한 도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고위험 상품이 날개 돋친 듯 생겨나고 팔려나간 데는 이유가 있다. 증권사에는 ELS가 좋은 조건의 자금 조달 통로였다. 회사채를 발행하면 금리를 줘야 하는데 ELS 상품을 내놓으면 오히려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상품을 주로 판매한 은행에는 ELS가 줄어든 이자마진을 보완할 중요한 비이자마진(수수료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고금리를 기대하고 투자 권유에 응한 투자자들이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투자자 책임 원칙을 무시하고 온정주의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품을 파는 금융업계도 반성해야 할 것이 많다. 사실 파생상품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예금보다 조금 더 높은 금리를 원하되 약간의 손실을 감내하겠다는 사람에게는 금리가 많이 높진 않더라도 하방 위험이 20~30%로 제한되는 상품을 마련해 권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파생상품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원금 100% 손실이 가능한 상품을 예금이나 적금의 대체재 삼아 대규모로 만들어 팔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하는 금융회사들이다. 약 1%에 달하는 선취 수수료에 정신이 팔린 은행과 증권사 내에서 이 상품의 본질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의견도 간혹 나왔으나 대부분 “장사하지 말자는 거냐”는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부정적인 담당자는 교체되고, 다음 담당자는 이 상품의 판매 규모로 경쟁해서 인센티브를 받는 구조가 지속됐다. DLF를 많이 판 은행들이 제재받는 통에 그때 빠진 국민은행이 ELS 최다 판매자가 된 것도 아이러니다.
파생상품 투자는 본질적으로 베팅하는 것이다. 개인투자자는 베팅에 참여해선 안 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금융사가 카지노와 다른 점은 고객의 상황에 맞춰 좋은 상품을 골라서 제대로 추천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역량과 의지가 없다면, ‘은행이냐 카지노냐’ 묻는 고객에게 할 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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