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가 미국 부·권력 탈취" 분노 등에 업고…트럼프, 더 강해져 돌아왔다

김형구 2024. 1. 27.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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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오른 미 대선…왜 다시 트럼프인가
“지금 이 나라는 내전 중입니다. 100여 년 전에는 세계를 위협하는 거악을 ‘나치’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민주당’이라고 부릅니다. 도널드 트럼프만이 이 나라를,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의 핵심 승부처로 꼽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이틀 앞둔 지난 21일(현지시간). 트럼프 지지자 에드워드 영(64)은 오후 7시 로체스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예정된 트럼프 유세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9시부터 생겨난 긴 줄에 합류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를 따라다니기 위해 560㎞ 떨어진 뉴저지주 집에서 12시간을 운전해 왔다고 했다. 체감온도 영하 25도까지 떨어진 혹한도 그의 ‘열정’을 막진 못했다. 그는 “날씨가 너무 추워 코에 동상이 걸리는 것 같고 뼈가 으스러지듯 아프지만 트럼프가 미국을 위해 한 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며 “트럼프가 니키 헤일리(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전 유엔대사)를 보기 좋게 쓰러뜨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의 기대대로 23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54.4%)은 헤일리 전 주지사(43.2%)를 두 자릿수 격차로 제쳤다. 지난 15일의 아이오와 코커스(전당대회)에 이은 2연속 과반 대승이다. 역대 공화당에서 처음 두 번의 경선을 연달아 이긴 사람은 모두 최종 대선 후보에 지명됐다. 트럼프가 사실상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굳혔다는 얘기다. 이변이 없는 한 민주당 후보가 될 조 바이든 대통령과 2020년에 이은 재대결이 유력하다.

‘못 배운 마초 인종주의’ 폄하는 잘못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가 다시 돌아왔다. 8년 전 대선 후보로 지명될 때보다 더 강력해졌다. 왜 다시 트럼프일까. 의회 난입 선동 혐의 등 통례를 벗어나는 언행으로 ‘민주주의 파괴자’로까지 불런 트럼프에 환호하는 열혈 지지자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트럼프의 귀환은 이민자와 중국을 비롯한 외국이 미국의 부(富)와 권력을 앗아갔다고 생각하는 백인 남성 중심의 분노·불안 심리와 관련이 깊다.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신조어가 ‘프레카리아트’다. 불안정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불안한 고용 상황의 노동자 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수십년간 민주당 정부가 묵인한 국경 개방에 따라 유입된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프레카리아트의 집합적 분노가 트럼프를 다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중앙일보와 함께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난해 1년치 성명·연설문·인터뷰 등 각종 발언을 분석한 빅데이터 컨설팅 업체 아르스프락시아의 김도훈 대표는 “트럼프 재등장의 저변에는 ‘미 유권자층의 정치적 리얼라인먼트(재편)’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저학력 백인 남자들이 안정적 직장을 갖고 전통적 가장 역할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과거 엘리트 정당으로 인식됐던 공화당을 지지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트럼프는 불안하고 원자화된 다수 노동자, 또 전통적으로 미국인 가치를 담보한다고 믿었던 백인 남성들의 불편해진 심기에 호소하고 있다”며 “이들의 지지를 단순히 ‘못 배운 사람들의 마초 인종주의’로 깎아내리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저학력·저소득 백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자긍심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집합적 기억과 분노의 근저에는 그럴만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바이든 대통령은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거시경제가 좋아지고 자연히 미국인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수효과를 얘기하지만 다수의 프레카리아트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것은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라며 “차라리 ‘내가 대통령이 되면 1년 안에 뉴햄프셔주 기름값을 절반으로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는 비전 설파가 더 매력적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뉴 햄프셔 비백인 59% 트럼프 지지

조 바이든
중앙일보가 뉴햄프셔 경선 기간인 지난 20일부터 23일까지 만나본 ‘열성 트럼피(트럼프 추종자)’들은 그를 지지하는 이유로 무너진 미국을 재건해줄 거라는 기대, 전쟁을 종식시켜줄 거라는 바람, 고물가 경제를 원상 회복시켜줄 거라는 희망을 언급하는 등 사유가 뚜렷했다. 23일 맨체스터시 앤소니 커뮤니티센터에서 프라이머리 투표를 마친 뒤 중앙일보와 만난 크레이그 로웰(41)은 “남부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자 행렬을 보라. 그 때문에 미국이 망가졌다”고 개탄하며 “이 나라를 폐허에서 재건하고 늪을 청소할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전 대통령뿐”이라고 했다.
니키 헤일리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통령이 되면 하루 만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에 대한 믿음도 강했다. 지난 22일 뉴햄프셔주 홀리스의 유세 집회에서 만난 대만계 미국인 쉬린 양(67)은 “트럼프와 시진핑(중국 국가주석)은 깊은 신뢰 관계가 있다”며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시진핑의 대만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트럼프가 다 막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45년 전 대만에서 미국 뉴욕주로 이주했다는 쉬린 양은 “미국에 사는 동안 트럼프가 대통령이었을 때 전쟁이 없고 가장 평온했다”고 떠올렸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주목할 만한 대목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층이 조금씩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6년 대선 승리의 기반이 됐던 저학력·저소득 중심의 ‘성난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유색 인종 등으로 지지층이 넓어지고 있다. 23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때 워싱턴포스트(WP)가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트럼프는 남성 응답자의 59%가 지지했고 여성으로부터도 50%의 지지를 얻었다. 헤일리 전 주지사가 얻은 여성 지지 비율 48%보다 2%포인트 높았다. 또 백인 응답자의 54%가 트럼프를 지지한 가운데 비(非)백인 응답자의 59%가 트럼프를 지지해 오히려 백인층보다 강한 지지세를 보이기도 했다. 23일 만난 리사 그레벌(53)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 기름값은 갤런당 1.8~1.9달러였고 식료품 물가도 안정적이었다”며 “나와 같은 40,50대 주부 중 많은 이는 민주당 정부가 망친 미국 경제를 되살릴 지도자로 트럼프를 원한다”고 말했다.

다만 1,2차 경선을 거치며 트럼프가 가진 한계 역시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화당원 중심으로는 똘똘 뭉쳤지만 무당층 저변에서는 반(反)트럼프 정서가 상당했고, 고소득·고학력 층에서는 트럼프의 부진이 여전했다. 조사업체 에디슨리서치가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유권자의 44%를 점하는 무당층 중에서 58%가 헤일리 전 주지사에 표를 몰아줬다. 또 전체 유권자의 35%가 중도를 자처했는데 이들 가운데 20%만 트럼프를 찍었다. 실제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는 대부분 지역에서 헤일리를 앞섰지만 하노버·라임·레바논 등 고학력 고소득층이 다수 분포한 부촌에서는 큰 표 차로 진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프레카리아트의 불안과 분노 표심을 공략하는 데는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본선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될 중도층 공략에 고전한다면 대선 레이스의 끝은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불안정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 계급을 뜻하는 독일어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2004년 유로메이데이 행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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