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 전경련 이끈 두 회장, 몸 안 아끼고 일했지만 끝내…
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⑩ 최종현·김우중 두 거인의 추억
최종현 회장은 1995년 증권사 사장으로 일하던 나를 불러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을 맡겼고, 2년 뒤 상근부회장으로 발탁했다. 나는 최 회장으로부터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대학 때는 케인즈의 유효수요 경제이론만 배웠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 같은 자유주의자의 경제사상이나 이론은 배운 바가 없었다. 최 회장은 시카고 학파라 불리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본산인 시카고대학에서 유학했다. 그 때까지 노벨 경제학상은 주로 하버드나 MIT 출신의 규제주의 학자들이 받아왔는데 1974년 뮈르달과 하이에크가 공동 수상한 것을 기점으로 대세는 시카고 학파로 넘어갔다. 당시 시카고대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6명이나 있었다. 최 회장은 친분이 깊은 게리 베커 등 학자들을 서울로 불러 세미나를 개최하고 시장경제에 대한 이론을 전파하는데 애썼다.
와병 중에도 출근 모든 대내외 회의 주재
최 회장은 늘 나라 걱정이 앞선 분이었다. 경제 위기가 닥치자 생사를 초월한 것처럼 몸을 던졌다. 1997년 6월 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으러 미국으로 떠났다가 9월에 귀국했다. 그 사이 부인이 간병하다 과로로 타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산소 호흡기를 휴대한 채 김영삼(YS) 대통령을 만났다. 위기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금리 인하와 임금 동결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뒤인 12월 초 다시 면담을 신청해 YS를 만났다. 나도 수행한 자리에서 YS는 “지나고 보니 최 회장이 말이 맞았다”고 후회했다.
최 회장은 와병 중에도 전경련에 나와 모든 대내외 회의를 주재했다. 전경련은 최 회장의 주창으로 ‘국가경쟁력강화민간경제위원회’를 발족하여 매달 업종별 경쟁력강화 대책 회의를 열고 정부에 건의할 내용을 정리했다. 사업가들은 경제위기를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하게 된다. 전경련은 여러 차례 ‘구조개혁특별법’을 만들어 규제를 풀어 달라고 정부 여당에 요청했다. 최 회장은 쉼 없이 몸을 혹사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1998년 1월 15일 추운 날씨가 폐암에 좋지 않다는 만류를 뿌리치고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건물에서 열린 ‘노사정위원회’ 현판식에 참석했는데 나는 ‘이러다 최 회장이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나’ 내내 조마조마했다. 와병 중에도 ‘21세기 일등 국가가 되는 길’이라는 책을 집필한 최 회장은 할 일을 많이 남겨 놓은 채 1998년 8월 26일 저 세상으로 갔다.
최 회장은 운명 2개월쯤 전에 나와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을 자택으로 불렀다. 무척 수척해졌고 다리가 퉁퉁 부어있었다. 직감적으로 왜 불렀는지 짐작이 갔다. 최 회장은 “오늘부로 나는 회장 직에서 물러난다. 김우중 대우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무대행직을 수행토록 연락하라”고 했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김우중 회장은 직무대행을 거쳐 1999년 2월 24대 전경련 회장으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3각 빅딜의 좌초 등 우여곡절 끝에 사업구조조정의 공이 전경련으로 넘어와 내가 그 일을 총괄한 것은 김우중 회장대행 시절이었다. 구조조정 방안을 짜고 기업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느라 몇 달 동안 밤잠 못자고 일했다. 나와 이병욱 팀장만 그랬던 게 아니라 김우중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결재 받으러 사무실에 가 보면 의자 등받이를 붙들고 졸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김 회장의 의자는 등받이가 높은 안락의자가 아니라 회의실 의자처럼 딱딱했다. “간이 침대라도 갖다 놓고 잠시 쉬시지 그러느냐”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998년 추석연휴 마지막 날인 10월 6일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각 그룹 회장 및 구조조정본부장들과 밤 11시까지 롯데호텔 38층에서 회의를 했지만 의견이 팽팽히 맞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나는 회의를 중단하고 새벽 2시30분에 귀가했다. 3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김우중 회장의 전화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곧장 대우 회장실로 갔더니 김 회장은 발전설비·철도차량 등의 경영주체 선정 문제 때문에 아침에 정몽구 현대 회장을 만날 예정인데 그에 앞서 나와 의견 조율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2시간이라도 눈을 붙였지만 김 회장은 한숨도 자지 않고 고민을 했을 테니 참으로 죄송했다. 그처럼 밤낮없이 일하던 김 회장은 중국 상하이 출장길에 뇌출혈을 일으켜 긴급 후송되어 서울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규제 탓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업인
나는 키신저 장관과 같은 거물과 대화를 나눈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일본의 세지마 회장이다. 그는 내가 탐독했던 소설 ‘불모지대’의 실존 주인공이었다. 이병철 삼성 회장과도 절친했고 우리나라 종합상사 출범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서를 이낙선 전 건설부 장관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결심을 얻게 한 분이기도 했다. 삼성물산이 종합상사로 변신할 때 고문단을 보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물러난 후 내가 도쿄에서 세지마 회장을 만났더니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나와 만나 대화라도 나누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김 회장이 전경련을 떠나는 순간은 이랬다. 1999년 10월 8일 전경련과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의 한일재계회의가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일본 손님들을 배웅한 뒤 김 회장이 잠깐 보자고 해 커피숍에서 마주 앉았다. 김 회장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내게 건넸다. 전경련 회장 사퇴 성명서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도 한국 측 대표로 여러 협력방안을 논의하던 분이 갑자기 그만둔다니…. 대우가 자금난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사정이 급박해졌는지는 상상도 못했다. 잠시 외국에 나가 있다가 오기로 했다면서 바로 공항으로 간다고 했다. 사퇴성명을 김 회장이 직접 기자단에 발표하는 게 좋을지 내가 대신 하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나는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 질문이 쏟아져 감당하기 어려워질지 모르니 제가 대신 하는 게 낫겠습니다”고 했다. 신라호텔 정문에서 표표히 떠나는 김 회장을 배웅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내가 모셨던 전경련 회장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다 끝내는 건강까지 상했다. 전경련 회장 뿐 아니라 내가 본 많은 기업인들이 그랬다. 기업인들 다수는 구조조정으로 제 분신과도 같은 기업을 매각하거나 문을 닫는 아픔을 겪었고, 김우중 회장은 그룹 해체라는 수난을 맞았다. 몇몇 그룹 회장들은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영어의 몸이 되었다. 전경련을 떠난 후지만 나는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손길승 SK 회장이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IMF 위기 상황에서는 그런 의사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논리로 변호했다. 이튿날 신문에 ‘30년 우정은 빛났다’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손 회장은 나와 진주중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한 친구이고 대학까지 동문이어서 그런 제목이 붙은 것이다.
다음은 김우중 대우 회장의 재판이었다. 나는 정부나 권력자가 정치자금이나 준조세 등을 내라고 하면 이를 거부할 수 없고, 그러다보니 결국 분식회계를 하게 되는 기업의 입장을 설명했다. 세 번째는 특검 수사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 회장 재판이었다. 나는 차명계좌가 생기게 된 유래를 설명했다. 기업주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 20~30%의 지분을 소유해야 하는데 갑자기 정부가 1인 대주주 지분 비율을 5% 미만으로 낮추라고 하니 경영권을 지키려는 뜻에서 결국 사내 임직원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흔히들 기업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룹 회장들의 재판에서 증언하면서 ‘기업인이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기업가 정신으로 사업보국을 실천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란 생각에는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계속〉
손병두. 동서투자자문 사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강대 총장, KBS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절충하며 ‘빅딜’과 구조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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