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연봉이 200만원? 가난한 이미지에 가두지 마세요"

유주현 2024. 1. 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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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연극 ‘와이프’ 화제의 배우 이승주
화제의 연극 ‘와이프’에서 마초와 게이를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이승주 배우. 김상선 기자
최근 소녀시대 수영의 연극 데뷔작 ‘와이프’ 공연 중 관객의 대포카메라 촬영 사건이 화제였다. 우리 관람문화에 무지한 외국인 관객이 벌인 해프닝이었다고 한다. 엉뚱한 이슈가 터졌지만 ‘와이프’는 연극계 블루칩 신유청이 연출한 보기드문 웰메이드 연극이다.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이 입센의 ‘인형의 집’을 창조적으로 해체해 성소수자와 다양성에 관한 담론을 제시한 작품인데, 2019년 국내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3관왕과 최초의 백상연극상까지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이번엔 수영 뿐 아니라 정웅인·김소진·박지나·송재림 등 매체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소녀시대 수영·송재림 등 출연 유명세

그런데 연극팬이라면 이보다 놀랄만한 재발견이 있다. 마초남 ‘로버트’에서 동성애자 ‘아이바’를 거쳐 하남자 ‘핀’으로 3단 변신하는 배우 이승주다. 2010년대 한태숙 연출의 ‘유리동물원’, 김광보 연출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M.버터플라이’‘사회의 기둥들’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다 2017년 예술의전당 기획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끝으로 무대서 사라졌다. 1년 전 국립극단 ‘세인트 조앤’으로 조용히 컴백했지만, 이번에 신들린 ‘게이 연기’로 빵 터졌다. 뮤지컬계 게이 연기의 달인 김호영이 연상될 정도인데, 빈틈없이 반듯한 외모라 더 충격적이다.

“스테레오타입의 동성애자 연기는 처음이라 초기엔 힘들었어요. 요즘은 매체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표현이 될까봐 오히려 안 찾아봤거든요. 아이바란 인물이 가진 상태에만 집중하니 연출님에게 ‘너무 남자답다’는 걱정을 듣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속된말로 ‘게이스런’ 몸짓이 조금씩 나오더군요. 역시 껍데기가 아닌 마음부터 채우는 게 옳은 선택이었나 봐요.”

걸그룹 소녀시대의 최수영(왼쪽)의 마초 남편 로버트도 이승주의 1인 3역 중 하나다. [사진 글림컴퍼니]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 ‘인형의 집’ 속 젠더 이슈가 현대에도 여전하듯, ‘와이프’도 1959년에서 시작해 1988년·2023년·2046년까지 시대별 에피소드의 순환구조 속에서 변함없이 소외받는 성소수자의 입장에 확대경을 댄다. 이승주는 막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1인 3역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로버트같은 인물, 아이바같은 인물, 핀같은 인물을 한 배우가 하는 게 정말 큰 의미가 있고, 셋이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근간에 내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게 관건이에요. 극단적인 캐릭터 사이 벽을 깨부수는 거죠. 세 사람을 가르는 시선은 하나의 틀일뿐, 그 틀로 사람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 같아요. 단순히 퀴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연극에 관한 이야기죠.”

2막에 20대였다가 3막에 50대 다른 배우로 등장하는 아이바는 동성 커플 관계상 갑에서 을로 극명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작가의 의도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연습 때 실제 성소수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딱 ‘50대 아이바’같은 분도 있더군요. 굉장히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태도였는데, 중년 게이로 산다는 게 그만큼 힘들고 외롭다고 해요. 젊어서는 당당히 싸웠지만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거죠. 어쩌면 가장 소외된 계층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스테레오타입의 동성애자 몸짓을 찰지게 표현하는 이승주. [사진 글림컴퍼니]
그들에게 공감이 잘 되냐고 물으니 “대한민국의 40대 남자 연극배우만큼 소외된 계층도 없다”고 답한다. “좀 웃픈 얘긴데, 연극한다고 하면 밥은 먹고 다니냐, TV는 언제 나오냐, 돈도 벌어야지 그래요. 30대까지는 미래성을 봐줬다면, 40대인 나를 보는 사회의 시선은 소외 그 자체죠. 연극에서 기반을 다져 매체에서 잘되신 분들이 토크쇼에 나가 ‘연봉 200만원이었다’는 식의 얘기는 제발 안했으면 해요. 본인이 좋아서 했고 얻은 게 있다면 그 시간과 노력을 돈으로 견줄 수 없는데, 그런 얘길 하면 어떤 부모가 연극하라고 할까요. 러시아처럼 존경받진 못할지언정 어둡고 가난한 이미지에 갇히는 게 속상해요. 연극 덕을 봤으면 연극이 너무 좋고 너무 배웠다고 말해도 모자란데, 한 달에 20만원 받았다는 얘기만 하는 건 화가 나요.”

완벽한 외모 때문에 편견을 갖기 쉽지만, 이승주는 누구보다 연극에 진심이다. 하지만 연극인이 연극만으로 연극판에서 버티기 힘든 시대인 건 사실이다. 그가 무대를 사랑하지만 떠나야 했던 것도 그래서다. 영화 ‘악녀’(2017), 드라마 ‘스케치’(2018) 등 매체 문도 두드렸지만, 개점휴업 상태가 오래 갔다. “작품 하나 끝나면 몇 개월 쉬게 되는 그 시간을 못 견딘 거죠. 우연히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됐는데, 나름 성취감도 있더군요. 연기를 관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세월이 갔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힘들 때마다 한태숙, 김광보 연출님이 ‘너는 연극배우다. 잊지 마라’는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혼자 많이 울었죠.”

5년 공백기 거친뒤 예민한 성격 둥글어져

연극 '와이프'에서 마초남 로버트를 연기하는 이승주. [사진 글림컴퍼니]
결국 다시 돌아온 것도 김광보 연출의 부름을 받고서다. 하지만 5년 만에 쿨하게 무대를 밟기란 쉽지 않았다. “미칠만큼 힘들었다”면서 오히려 데뷔무대답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수영을 추켜세웠다. “발가벗겨진 느낌이라 처음엔 무대에 잘 서있기도 힘들거든요. 그런데 수영이는 종류는 달라도 큰 무대에 많이 서봐서 그런가봐요. 혼자 준비한 것뿐만 아니라 리액션도 잘하고 되게 살아있죠. 영감을 주는 배우랄까요.”

공백기가 약이 된 면도 있다. 연기에 대해 병적으로 예민하던 성격이 조금은 둥글어졌다.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해요. 전에는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워갈 정도로 필사적이었죠. 연출님한테 새벽에 카톡 보내고. 그저 잘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그게 남을 불편하게 했다는 걸 쉬면서 깨달았어요. 본질은 그대로겠지만, 날카롭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작인 ‘튜링머신’ 공연과 ‘와이프’ 연습을 병행하는 ‘겹치기’도 데뷔 이래 처음 해 봤다고. “스스로 가장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지금 간절한 버킷리스트도 생겼다. “오래 전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을 봤거든요. 마치 연극을 찍어놓은 것 같은 오래된 흑백영화였는데, 왠지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그 영향으로 연극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10년 전 ‘유리동물원’ 드라마투르그였던 이화여대 강태경 교수님이 최근 햄릿에 관해 쓰신 책을 보내주셨어요. ‘자네의 햄릿을 꼭 보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요. 복귀 후에도 늘 불안했었는데, 한 사람의 작은 관심이 다른 사람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더군요. 죽을 때까지 연극을 놓지 말자고 결심했고, 햄릿도 꼭 하고 싶습니다.” 왕자형 외모에 살짝 미친 듯한 연기가 전매특허인 이승주 만큼 햄릿에 찰떡인 배우가 있을까.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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