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겨울 편지를 쓰는 밤
겨울 편지를 쓰는 밤
박남준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툇마루에 떠다 놓은 물이 꽁꽁 얼음이 되는 날들도 있었다
그 겨울밤 문밖에 나서면
쩡쩡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한 푸른 별들 부끄러워서
고개를 묻던 날들이 있었다 반문처럼
그 별들에게 보이지 않는 길의 나침반을 묻기도 했었다
불쏘시개로 쓰던 잔 나뭇가지들이며 소나무잎들 다 떨어진 지도 십여일에 가깝다 나무청의 나무들은 한 사흘은 버틸 수 있을까 새벽부터 구들장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새우처럼 웅크린 채 미적거린다 새들이 또 흉을 보고 있겠지 갈퀴와 큰 자루를 찾아 들고 앞산에 오른다
노란 소나무잎들 어느새 저렇게 수북하게도 떨어져 내렸구나 나 여기 숲에 살며 그간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은 채 나뭇잎들 긁어가거나 새파랗게 살아 있는 나무들 베어 오지 않았던가 내 한 몸 따뜻한 잠자리를 얻고자 그 나무들 깜깜한 아궁이 속에 들이밀고 불을 때며 살아왔는데
갈퀴를 내려놓고 한동안 우두망찰로 앉아 있었다 해가 뉘엿거린다 너 뭐 하니 저만큼에서 직박구리가 꾸짖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그래 나무하러 왔었지 갈퀴 나무 한 짐을 지고 서둘러 내려온다
툇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 불을 댕긴다
뜰 앞에 무성하던 지난여름의 풀들이,
나무들의 낙엽들이 경배를 하듯 낮게 엎드린 채
다시 돌아올 거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갈 수 있겠지
무엇에게인가의 거름이 되어 돌아갈 수 있겠지
하루해가 진다
새들이 돌아간 겨울 저녁 숲에 적막처럼 어둠이 깃든다
되뇌어본다
이 겨울 나의 오늘이 참되지 않고 어찌 내일의 참됨을 바라랴
편지를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올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내가 나에게 써야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뉘우침의 편지를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그 겨울밤
밤새 세상을 하얗게 눈은
흰 눈은 내릴 것이다 그 눈길 위에 첫발자국을 새기며 걸어
편지를 전하러 갈 것이다 그 발자국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것이다
『적막』 (창비 2005)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눌 때 날씨는 좋은 소재가 됩니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빠지지 않는 인사가 되었고요. 평범한 일이지만 동시에 반갑고 다정한 마음을 느낍니다. 단절이라는 벽을 넘을 수 있는 첫걸음이 되어주는 것이니까. 물론 날씨에 관한 이야기는 친밀한 관계에서도 빠지지 않고 오갑니다. ‘춥다고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지 말고 장갑을 껴야 해.’ 같은 말을 누가 해주었다면 그는 분명 나를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듯하지만 사실은 큰 것. 그러니 앞으로 더 많은 날씨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빛에 대해서. 그 아래 살아가는 나와 너에 대해서.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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