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골’ 쇼팽의 세밀한 울림, 지친 가슴 은밀하게 파고들다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대표적인 음악가가 바로 쇼팽이다. 그는 뛰어난 테크닉과 표현력을 갖추었지만 강한 터치로 연주를 할 힘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자신이 작곡한 폴로네즈를 치다가 피아노의 현을 끊어뜨린 제자를 그토록 부러워했을까. 쇼팽은 몸만 약한 게 아니라 심약하기까지 해서 무대 공포증도 있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들 앞에서만 연주할 수밖에. 다행히 상류층 엘리트들 사이에 문예 살롱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쇼팽의 놀랍도록 섬세하고 심오한 울림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팬이 적지 않았다.
피 토하고 설사 시달리다 38세 숨져
친구들 덕분에 쇼팽은 조국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했고, 혁명이 실패한 후 러시아 정부가 벌였던 보복조치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망명자 신세까지 면하지는 못했고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빈에서 안전을 보장받기는 힘들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고국인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 있던 폴란드의 지식인과 귀족들이 그의 정착을 도왔으며, 쇼팽은 빼어난 피아노 실력뿐 아니라 단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와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를 갖춘 덕분에 몇 달 만에 파리 문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파리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늘 외롭고 고독했다. 쇼팽에게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국에 대한 향수는 커졌다. 죽마고우인 안토니 보진스키와의 재회는 그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기쁨이었고, 안토니의 여동생 마리아 보진스카와 바로 연인 관계가 된다. 하지만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쇼팽은 심하게 감기를 앓았는데, 얼마나 증상이 심했던지 바르샤바 신문에 쇼팽의 사망기사가 실렸다가 취소될 정도였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병약한 청년을 사위로 삼고 싶은 부모는 없는 법. 쇼팽은 마리아의 어머니로부터 파혼 통보를 받는다.
쇼팽에 대한 상드의 애정은 놀라워서 쇠약해진 쇼팽의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해 엄청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사가 쇼팽에게 휴양을 권하자 상드는 그를 데리고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까지 먼 길을 떠났다. 하지만 섬에 도착하자마자 쇼팽이 기침을 시작했고 급기야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휴양이 끔직한 유배 생활이 된 것이다. 쇼팽은 자주 열이 났고 피를 토했으며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창작열이 식지 않아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으니 위대한 인물들은 역시 뭔가 다르다. 이때 작곡된 곡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24개의 프렐류드다.
여행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온 상드는 자신이 상속받은 저택이 있는 프랑스의 중부 평원에 위치한 노앙으로 쇼팽을 데리고 왔다. 상드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시골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 쇼팽은 생기를 되찾았고, 상드는 쇼팽에게 플레엘 피아노를 구해주었다. 쇼팽의 열 손가락을 타고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고 그렇게 떠오르는 악상을 오선지에 옮기면 주옥같은 작품이 되었다. 유명한 ‘발라드 3번’과 ‘발라드 4번’ ‘녹턴 c단조’ ‘환상곡 f단조’ ‘폴로네즈 A♭장조’ ‘스케르초 E장조’가 모두 이 때 만들어졌다. 한편 상드는 쇼팽이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파리에서 열렸던 대규모 연주회에서 상드의 응원 속에 쇼팽은 마침내 무대의 부담을 이겨내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도 끝은 있는 법이다. 수년 간 쇼팽에게 헌신적이었던 상드의 사랑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성격 차이가 너무 컸다. 쇼팽은 몸도 약할 뿐 아니라 모든 것에 예민하고 까다로웠고, 상드는 매사에 대범하고 자기 주도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너무 달라서 끌렸고 그렇기에 서로를 참기 힘들었다. 쇼팽은 상드가 자기를 남자로 존중하지 않고 어린 아이나 병자 취급 한다고 불만이었고, 상드는 쇼팽이 이유 없이 질투를 하고 토라져서 말을 안 하는 것 때문에 괴로웠다. 결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상드와의 이별은 심신이 연약한 쇼팽에게 치명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 모든 음악 활동이 중단되고 레슨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먹고 사는 것도 큰 걱정거리였다. 심한 신경통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쇼팽을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자 제인 스털링의 런던 초청에 그가 선뜻 응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런던의 춥고 습한 날씨와 탁한 스모그가 쇼팽의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드라마틱하게 압도하려하지 않고 조근조근 속삭이는 피아니스트가 낯설었던 런던의 청중들은 그의 연주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은 쇼팽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곡 없지만 소품 200곡 넘게 작곡
약육강식의 시대다.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한다. 이 세상은 강하고 큰 소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에 목마르다. 쇼팽은 바로 그 세밀한 소리로 우리를 매혹한다. 그의 곡에서는 조심스럽고 은밀하며 애정 어린 낮은 속삭임이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하이네는 쇼팽을 피아노로 영혼을 치유하는 천사라고 했다. 그는 몸이 약했던 만큼 예민했고 체력이 부족했던 만큼 정교했으며, 인생이 힘들었던 만큼 소리의 울림을 민감하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지문이 선명하다. 우리가 쇼팽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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