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로 번 600억으로 문화재단…“후세 영향 주니 남는 장사”
오황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
‘사물의 시차’ 전시는 지난 100년간 우리 일상의 시공간에 존재하며 현대 디자인의 모태가 된 디자인 가구 11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현대 아파트의 효시라 불리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싱크대부터 장 프루베, 찰스 앤 레이 임스, 한스 웨그너 등이 디자인한 전설 같은 가구들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수집된 이 빈티지 가구들은 모두 두양문화재단 오황택(75) 이사장이 수십년 간 하나씩 모아온 개인 소장품이다.
1978년 단추회사 ‘두양’을 설립한 오 이사장은 2013년 재산의 80%인 약 600억원을 기부해 두양문화재단을 설립한 후 2015년 서울 가회동에 청년 인문학교 건명원을, 2022년 이함캠퍼스를 열었다. 단추회사를 운영하던 사업가가 인문·예술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게 된 사연은 뭘까.
Q : 46년간 ‘단추’ 한 우물만 팠습니다.
A : “패션 브랜드를 해 보라는 제안이 여러 번 있었죠. 그런데 내가 천생 장사꾼이라 패션사업에 투자해 이익을 얻기까지 들어가는 돈과 시간을 계산해 보니 단추 사업에 계속 집중하는 것보다 못하더라고요. 그러니 딴 데 눈길을 돌릴 이유가 없었죠.”
친구 아버지가 운영 단추공장 입사가 계기
Q : 단추공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A : “어려서부터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어요. 대학도 경영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공부를 못했어요.(웃음) 점수 맞춰 국문과를 갔지만, 전공 공부 대신 경영·마케팅 이론 등에 관련된 책들만 읽으면서 혼자 사업할 궁리만 했죠. 군 제대 후 복학 않고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단추공장에 입사했어요. 현장을 알아야 되니까. 1년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신혼집을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기계 3대를 두고 서울 거여동에서 직원 5명과 시작한 게 지금의 두양입니다.”
두양은 현재 국내 단추기업 1위 업체다. 한 달에 약 2000만~3000만 개, 1년이면 약 2억4000만 개의 단추를 생산한다. 매년 새로 개발하는 단추 디자인만 100가지 이상이다. 보라카이·바이엘·빌리브·말리부·둥그니·뽀드득·보리수 등 단추 이름도 흥미롭다. “단추에 이름 붙이는 게 제일 골치 아픈 일”이라 할 만큼 그때그때 생각나는 지명과 단어들을 붙였기 때문이다.
Q : 단추 회사 사장님이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A : “처음엔 나도 옷에 구멍만 뚫으면 달 수 있는 게 단추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단추가 옷의 악센트이자 화룡점정이더군요. 단추 하나 잘못 달면 옷 자체가 이상해져요. ‘단추도 디자인이다’ 깨닫게 될 무렵, 일본 출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돼요. 1980년대였는데 호텔 방에서 모찌를 먹는데 포장이 어찌나 정성스럽고 예쁘던지. 당시 우리나라에선 ‘신앙촌 캐러멜’처럼 디자인이고 뭐고 없이 투명 비닐에 한 번 싸서 양을 많이 담는 포장이 최고였죠. 그런데 일본은 모찌 하나도 예쁜 상자에, 예쁜 포장지에 담더라고요. 상자 안에 회사 연혁과 철학을 적은 종이까지 넣어서. 소비자가 원하지 않으면 생산자는 절대 이렇게 안 만들어요. 포장이 많아지고 정성이 들어갈수록 돈이 드니까. 값이 좀 비싸도 감각 있는 디자인 제품을 사겠다는 소비자들의 안목이 일본의 문화를 만들고 있구나, 문화는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구나 깨달았죠.”
A : “문화는 모든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 생산재예요. BTS가 직접 벌어들인 외화 수익이 얼마인지는 중요치 않아요. BTS를 통해 형성된 ‘프롬 코리아’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신뢰와 영향력이 대단한 거지. 문화는 내수 시장이 탄탄하게 형성돼 있어야 힘을 받죠. 1980년대에 포니 자동차가 수출을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내수시장이 탄탄했기 때문이에요. 수출만 생각하고 차를 만들 순 없으니까요. 소비자의 안목이 높아져야 생산자의 감각도 높아지겠구나. 소비자의 안목을 높이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고민했죠.”
Q : ‘소비자의 안목이 문화 수준을 높인다’는 생각이 이함캠퍼스의 시작인가요.
A : “평범한 이들의 안목이 높아지려면 좋은 것을 많이 봐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오리지널 예술·디자인 작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공간에 욕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기획팀이 하지만 예전에 단추 디자인 샘플 결정은 제 몫이었죠. 강원도 어디쯤 혼자 가서 고민했는데, 오가던 길에 지금의 이함캠퍼스 자리를 봤어요. 여기라면 사람들이 올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 수 있겠구나, 그 공간에 내가 수집한 것들을 전시해보자 결심했죠.”
문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 가장 큰 생산재
Q : 예술·디자인 작품 수집 기준은 뭔가요.
A : “한때 내 별명이 ‘독립군’이었어요. 남의 말을 안 들으니까.(웃음)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권해도 내 맘에 안 들면 ‘이거 내꺼 아닌데’ 하죠. 책도 잘 안 봐요. 선입견 갖는 게 싫어서. 미술·디자인 전공도 안 했지만 적어도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에 연연하진 않아요. 베토벤만 최고가 아니거든요. 뽕짝으로 누군가 위안을 받는다면 그 또한 최고죠. 창고에 가면 녹슨 철제 가구, 문짝, 램프들이 많아요. 유럽이나 미국에선 ‘고철’이라고 값도 얼마 안 하는데 나는 그런 ‘언노운(unknown·알려지지 않은)’한 것들에도 관심이 가요. 1달러든, 1만 달러든 내 맘을 울리는 게 중요하니까.”
Q : 이함캠퍼스는 완공까지 23년이나 걸렸습니다.
A : “파리나 로마를 여행하면서 느낀 건 ‘천년이 지나도 그 시대 최고의 예술가·장인들과 자본이 조화를 이룬 명작은 남는구나, 이걸 보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오는구나’였어요.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좋은 것을 채우고 싶어서 오래 고민했어요. 덕분에 김개천 건축가와 좋은 인연도 쌓았죠. 건명원 설립도 김 건축가가 불쑥 던진 한 마디 ‘인문학에 관심 있으신가요?’에서 시작됐으니까요.”
건명원은 개교 당시 최진석(서강대 철학)·배철현(서울대 종교학)·김개천(국민대 공간디자인학)·김대식(카이스트 전자전기공학) 등 인문·예술·과학 분야 스타 교수 8명을 주축으로 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Q : 건명원 개교 기념사 중 ‘시대의 반역자를 키워달라’는 말이 흥미롭더군요.
A : “시대를 벗어나라, 틀을 깨라는 말이죠.(웃음)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고 시대가 변하면 지향해야 할 가치관도 달라져요. 우리 때는 ‘돈은 남자가 버는 것’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아니죠. 지금의 20대가 생존을 넘어 성공하려면 20년 후에 바뀔 세상을 예측하고, 그러려면 현재의 가치관을 깨 부숴야죠. 건명원 학생들을 뽑을 때도 ‘뭘 잘 하는 사람’보다는 ‘뭔가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해요. 교수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기’보다 인간의 본능대로 ‘생물답게 살기’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에너지 충만하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망대로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젊은이들을 많이 배출하고 싶어요.”
Q : 젊은이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A : “목적지로 가는 길은 많아요. 어떤 방법으로 가느냐가 각자 다르죠. 인문학은 천 년 전 사람들 이야기 중 오랜 시간 공감대를 형성한 공통분모들이라 좋은 길잡이가 되죠. 물론 어떤 것을 취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이에요.”
Q : 재산의 80%를 인문·예술을 위한 재단에 기부하셨어요.
A : “내가 100살 넘어서까지 살 자신이 없어서요.(웃음) 기껏 살아야 90살 정도일 것 같은데 그때까지 쓸 돈을 계산해 보니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타고,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밥 먹으면서 놀아도 번 돈을 다 못 쓸 것 같단 말이죠. 자식에게 주든지, 사회에 환원하든지 결론은 두 가지였고 난 후자를 택한 거예요.”
Q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시네요.
A : “통장에 적힌 숫자는 종잇조각일 뿐, 돈은 실제로 써야 진짜 내 돈이 됩니다. 닭 두 마리를 삶아서 나는 한 마리밖에 못 먹는데, 그걸 움켜쥐고 있다가 썩히면 낭비죠. 빨리 이웃과 나눠 먹는다면 효율적이겠죠. 나는 계산에 밝은 장사꾼일 뿐, 대단한 철학은 없어요. 좋아서 관심 있는 학교도, 미술관도 만든 거고 나 죽은 후에도 사람들한테 오랫동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죠.(웃음)”
인터뷰 내내 오 회장은 ‘장사꾼이라 말주변이 없다’면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아마도 꾸준한 메모 습관이 생각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는 두양을 운영하면서 3개월마다 한 번씩 대차대조표를 직접 만들고, 마지막 장에는 이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자신을 움직인 생각들을 짧은 소회로 남겼다. 평상시에도 작은 노트와 연필 또는 휴대폰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그렇게 쌓인 일기장과 수첩이 수십 권. “생각이 정립돼야 힘이 생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