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의 동료시민? 보스만 있고 동료는 없다
“동료라는 생각 자체가 없어. 그냥 위아래만 있어. 그러니 같이 일할 수가 없어.”
오래전 한 친구가 ‘동료 관념’이 없던 한 직장 동료의 ‘최후’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그 동료는 회사 체계를 수평적인 팀 체제로 재편한 지도 오래됐는데 오래전 직급체계에 익숙한 탓인지 여전히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자기 위인지 아래인지만 파악했다고 한다. 심각한 것은 같은 팀장들끼리도 그런 식으로 관계를 설정하다보니 무엇보다 팀별 협업이 중요한데 만사를 ‘지시’로만 생각하는 그 사람만 끼면 도무지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위아래’만 챙기는 사람과는 협업이 안 되더라
그가 ‘복명’한다는 ‘위’가 내리는 대부분의 ‘지시’는 협업이었다. 팀별로 협업해 선택 가능한 몇 가지 ‘안’을 만들라는 것이 ‘위’의 ‘지시’였다. 문제는 그 지시에 그가 복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지시를 받으면 협업 관계에 있는 다른 팀장들에게 다시 ‘지시’했다. 자기가 검토할 수 있는 안을 만들어오라고 말이다. 토론과 협업이 될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그가 ‘아래’로 여기는 사람들은 반발했다. (특히 그가 고약했던 것은 명목적인 직급체계 관념에서 자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대할 때였다고 한다. 같은 팀장이 된 동료에게도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명령하고 가끔 하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아래에서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경영진 입장에서도 점차 문제가 됐다. 과거 철저하게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던 직제 시절에 그의 지시 중심적 업무 수행은 꽤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화무쌍해지면서 경영진도 자기 판단만을 믿고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위험해졌다. 경영진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여러 제안과 논의가 필요했는데 그는 계속 ‘위’의 ‘지시’만을 기다렸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위’에 지시를 ‘요구’하는 역설이 됐다. 결국 그는 모든 업무에서 배제되는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최근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것은 ‘갑자기’ 정치적으로 부상한 ‘동료 시민’이라는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이 말이 한국 사회에서 어느 때부터 사용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2010년대 들어 곧잘 여기저기서 쓰인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언제부터인가 이 말에 ‘감각적으로’ 호응하면서 여기저기 글을 쓸 때 종종 사용했으며 ‘동료’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굳이 ‘감각적’이라고 수사를 붙인 것은 정확하게 규정된 개념적인 말로 사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적으로 보이지만 내가 ‘동료’라는 말에 감응해 책까지 쓰게 된 데는 약간의 시대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지도교수 은퇴식에서 새로 부임해 온 교수가 ‘동료’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지도교수가 자신에게 스승과 같은 존재라면서 학부를 다닐 때부터 지도교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학문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했다. 그런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이제 ‘동료 교수’가 되어 이 자리에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참 신선했다. 아마 1990년대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하늘 같은 스승에게 이제 막 임용된 ‘햇병아리’ 교수가 ‘동료’라는 말을 쓰는 것이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과 지도교수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논쟁하며 연구하는 ‘동료’라고 말했다. 가슴에 울림이 남아 곱씹어보니 과연 옳은 말이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수직적 스승-제자의 관계이겠지만 연구자 관점에서 보면 철저하게 수평적인 동료관계여야 한다.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다. 특히 발표가 있기 전에 오류를 잡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동료가 계속 연구자일 수 있게 하는 연구자의 동료로서 윤리다. 이처럼 상호 협력과 검증으로 서로의 오류를 바로잡아주는 것이 가장 큰 윤리인 연구자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수평적이어야 한다. 수평적이지 않으면 권력에 의해 발견됐더라도 결코 오류를 지적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는 연구자에게 치명적이다. 따라서 동료관계의 수평성은 연구자의 세계를 보호하는 직업윤리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계속 연구자로 존재하게 하는 우정의 윤리적 근본이다.
협력과 검증으로 오류 잡아주는 ‘동료’
이 동료라는 말에 흥미를 느끼며 다시 생각하게 된 말이 1980년대를 풍미한 ‘동지’였다. 한국에서는 ‘동지’가 공산주의자나 쓰는 불순한 말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보수우파 정당인 국민의힘에서도 당원을 지칭할 때는 ‘동지’라는 말을 쓴다. 정치 영역을 규정하는 말이 사실은 적과 동지다.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정당을 만들고 정당에 모이고 그 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실현하려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관계의 수평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지’라는 말을 쓴다. (신정체제에 가까운 북한에도 이 흔적은 남아 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위대한 수령’인 김일성도 ‘동지’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도 ‘동지’고, ‘최고존엄’인 김정은도 ‘동지’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동지라는 말은 철저하게 위계적이고 배제적이다. ‘다름’이 허용되지 않는다. 동지는 정치적 입장의 같음을 강조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같음의 강도와 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같음의 강도와 순도가 높을수록 적을 제압하고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는 데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동지’들은 외부와의 투쟁만큼이나 내부에서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제거하는 데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특히 외부와의 적대가 격화할수록 더욱 그런 양상으로 흐른다. “동무는 반동이야”는 북한에서만 나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결사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같음의 순도와 강도가 강조될수록 거기에 ‘수평성’은 사라지고 ‘수직성’만 남는다. 동지에서 ‘동’은 사라지고 ‘지’만 남으며 그 ‘지’를 가장 순수하게 체현하는 존재를 정점으로 위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모든 위계는 정점에 있는 자의 뜻을 받들고 실현하는 것에 의해 그 존재 가치를 얻게 되며 나머지는 철저하게 배제되거나 제거된다. 단적으로 말해 동지가 강조되는 조직에서는 자칫하면 보스만 남고 나머지 동지들은 사라지고 그 동지조차 되지 못하는 자들은 제거된다.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적 ‘동지’
‘동료’라는 말을 재발견하고 사용하려 한 것은 바로 동지라는 말로부터 ‘제거된 존재들’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냥 시민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동료 시민’이라고 한 이유는 시민으로부터 배제되고 제거된 이들도 다른 이들과 협의하고 협업하는 관계가 됐을 때 시민으로서 존재감이 있는 삶, 즉 활동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료는 위아래 개념이 아니라 옆의 개념이다. 위아래가 일방적 지시 관계라면 옆은 수평적 논의와 협업 관계다. 무엇보다 옆은 ‘의견’을 가진 존재로 존중돼야 하며 협의해서 결정하고 상호 보완적으로 협업하는 관계다. 지시와 분업이 필연적으로 소외를 일으킨다면, 협의하고 협업하는 동료관계에서는 소외가 발생하지 않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쓴다. 소외된 자가 동료일 수는 없지 않은가?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동료 시민’이라는 말을 들고나왔다. 그의 말을 잘 살펴보니 그는 이 동료에서 소외돼 ‘아직’ 동료 시민이 아닌 이들이 들어설 자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들을 대하는 ‘이미 시민’들의 덕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쓴 듯하다. 물론 ‘이미 시민’들이 ‘아직 시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동료가 돼‘주는’ 것은 시민의 큰 덕성이고 권장할 일이다. 재해를 당한 낯선 동료 시민을 위해 용기를 내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내주는 것이 동료의식이며 이것은 시민의 중요한 덕성이다.
그러나 폴리스(정치체)의 덕성은 이 ‘이미’와 ‘아직’의 간극을 메꾸어 ‘아직’ 동료가 아닌 자리에 머무른 시민도 동료가 될 수 있도록 한다. 폴리스의 가장 큰 목적은 시민이 존재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시민의 존재감은 무엇보다 다른 시민들과 분별력 있게 협의하고 협업하며 활동을 도모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빠짐없이 아고라(광장)에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계단에 막힌 장애인을 부축하는 동료 시민의 덕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경사로를 만들어 장애인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폴리스와 ‘지도자’의 미덕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미덕을 시민의 미덕으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폴리스와 지도자의 악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동안에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동료를 강조하며 한국 정치의 장에 ‘동료 시민’이란 말을 등장시킨 바로 그 정치세력과 정치인의 관계가 과연 동료인지 의구심을 가지게 한 사건이다. 김건희 여사의 문제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대통령실로부터 사퇴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물론 명분은 김건희 여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김경율 비대위원을 서울 마포에 공천하는 것이 ‘사천’이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나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한국 시민들에게 낯선 이를 외면하지 않고 용기 내어 서로 도와주는 동료의 덕성을 발휘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관계부터 동료관계인지를 점검해보라 권하고 싶다. 대통령과 비대위원장은 동료관계인가? 동료관계였던 적이 있는가? 혹시 거기 동료는 없고 보스만 있는 건 아닌가? 동료가 되려는 순간부터 보스에 의해 배제되거나 제거되는 그런 관계가 아닌가? 정말 동료관계가 시급한 곳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있는 그곳 아닌가?
당신이 있는 곳이 동료가 가장 필요한 로두스
이야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 이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 과연 맞는 것 같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딱 필요한 말을 이미 그리스의 이솝 우화가 말하니 말이다. 다른 곳이 동료관계가 필요한 곳이 아니다. 다른 곳이 동료관계가 필요하다고 설교할 장소가 아니다. 그곳이 동료가 가장 필요한 로두스이며 그곳에서 지금 설교하셔야 한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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