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위해 10년간 나치즘 외면한 독일의 민낯

김수미 2024. 1. 2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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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패망 후 혹독한 굶주림 시달려
약탈 등 생존 우선돼 학살 문제에 침묵
1945년 전범 24명 재판… 국민은 무관심
극히 일부만 처벌 받고 입법 통해 사면키도
되레 ‘나치즘에 희생됐다’며 자기합리화
역설적으로 서독 민주주의 심리적 토대돼

늑대의 시간/하랄트 얘너/박종대 옮김/위즈덤하우스/2만8000원

위안부·강제동원 등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논할 때마다 독일은 모범 사례로 거론된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뱌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고 2009년 9월1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 기념식에서 무릎을 꿇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독일은 끊임없이 사과하고, 여전히 피해자들에게 배상·보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나치를 찬양하는 이들은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 조치까지 했다.
아돌프 히틀러
하지만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는 동안 집단적으로 외면했던 독일인들은 전후에도 마치 과거를 잊은 듯 자신들을 나치즘과 전쟁의 희생자로 여겼다. 과거사 청산은 후세대의 몫이었다.
신간 ‘늑대의 시간(부제: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과 부도덕의 나날들)’은 1945∼1955년 전후 10년간 홀로코스트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 속에 독일이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룩해 온 과정을 파헤쳤다. 저자는 이 기간을 공백기 혹은 ‘늑대의 시간’이라고 명명했다. 인간이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가 되고,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 쓰는 늑대로 타락한 시대라는 의미다.
하랄트 얘너/박종대 옮김/위즈덤하우스/2만8000원
전쟁 후 폐허가 된 독일에는 폭격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다른 곳으로 대피한 사람 900만명, 난민과 실향민 1400만명, 강제노역과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 1000만명, 전쟁포로로 잡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수백만 명 등이 섞여 있었다.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린 이들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생존 욕구는 죄책감을 차단했다. 저자는 “자신의 용인과 외면하에 자행된 조직적인 대량 학살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전후 시대를 버텨낼 용기와 에너지가 없어서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연합군은 독일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물리적인 관리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독일인의 오만함을 몰아내고 12년 동안 그들에게 주입된 파시즘을 제거할지 구상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독일인들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던 파시즘은 마치 공기처럼 사라지고 과거를 아예 잊은 듯했다. 저자는 “전쟁이 끝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신문에 ‘왜 세상 사람들이 독일인을 미워하느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독일에서는 전쟁 야수들과 국가 붕괴에 대한 비판이 계속 나왔지만, 홀로코스트나 유대인 문제는 침묵했다. 개신교의 죄악 고백문과 가톨릭 주교회의의 죄악 고백에도 유대인 학살은 언급되지 않았다. 유대인으로서 1933년 독일을 떠나야 했던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실제 있었던 일을 직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 깊고 완강하고 때로는 야만적이기까지 한 자기부정의 가장 뚜렷한 외적 증상”이라고 묘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이뤄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독일군과 정부 기관의 나치 지도자 24명이 기소됐다. AFP연합뉴스
대다수의 독일인은 자신들이 국가사회주의와 나치즘에 희생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를 열렬히 숭배했던 사람들이 죄인이 아닌 기만당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또 전쟁 자체에 책임을 물으며 죄책감을 덜려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그동안 겪은 일을 말없이 견뎌내야 했던 위대한 침묵자로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저자는 “말을 삼가는 분위기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독일인들의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은 언론과 소책자, 논문에 넘쳐나,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고통에만 빠져 허우적거린다”고 비판했다.

연합군은 전후 나치 저항자들이 주요 전범들을 응징하거나 보복 행위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지도 않았다.

결국 국제 군사재판소에서 1945년 11월부터 주요 전범 24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당시 20개국에서 취재기자들이 몰려왔지만, 정작 독일에선 무관심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주요 전범들은 자살을 통해 실질적 책임을 면한 히틀러, 힘러, 괴벨스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면서 자신들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 희생자인 척했다. 이들 중 12명만 사형 선고를 받았고, 강제수용소의 의사, 법률가, 주요 경제계 인사 등 나치 엘리트 185명에 대한 재판에서도 극히 일부 주범만 처벌을 받았다.

망각의 망토라도 뒤집어쓴 듯 연방의회 역시 첫 개원 직후 연방 사면, 탈나치화 종결 권고, 해고된 공무원 원대 복귀 등 연합군이 단행한 정치적 숙청을 무효화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1954년에는 ‘제2차 사면법’을 통해 가해자들이 명령에 따라 불가피하게 저지른 행동이라는 면죄부를 줬다.

심지어 전직 나치 관리뿐 아니라 중범죄를 저지른 나치 친위대원들은 나치 정권하에서 근무한 경력이 삭감되지 않고 연금에 반영됐다. 사회 전반의 대세 순응주의와 경제 호황 덕분에 나치 엘리트에 대한 사상 검증도 이뤄지지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왼쪽 두 번째)가 2019년 12월6일(현지시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서 과거 독일의 유대인 학살 전쟁범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뉴시스
전 유럽이 전쟁의 희생자들을 애도할 동안 독일은 현실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광기에 가까운 부지런함을 이용해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독일의 68혁명 세대는 부모 세대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격렬한 갈등을 겪었지만, 그 덕분에 경제적 여유를 누린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전후 대다수 독일인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희생자로 여긴 집단적 자기 합리화는 학살당한 수백만 명에 대한 모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독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심리적 토대가 됐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 토대가 있었기에 늦게나마 끔찍한 과오를 꺼내 들고 피해자들 앞에 무릎 꿇을 용기도 생긴 것 아닐까.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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