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보고서 작성·인사 불이익 등 직권남용 인정 안 해 ['사법농단' 1심 무죄]

이종민 2024. 1. 26. 21:2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쟁점별 재판부 판단 내용
재판 개입·법관 블랙리스트 등 혐의
290차례 재판… 공소장만 300여 페이지
‘파견 판사 외교부 입장 작성’ 檢 지적에
“ICJ 제소 가능성 검토… 양승태 지시 아냐”
검찰, ‘숙원’ 상고법원 설치 협조 위해
박근혜 정부에 재판 정보 제공 주장도
“파견법관 동향수집 등 직권남용 여지”
내달 초 임종헌 전 차장 등 판결 주목

법원이 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지적된 행위 대부분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고, 인정된 일부 혐의 역시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소장만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날 재판은 혐의가 방대한 만큼 선고에도 4시간27분이 소요됐다. 시간이 길어지자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10분간 휴정을 하기도 했다. 최대 쟁점은 대법원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직권을 남용해 재판의 독립을 침해했는지 여부였다. 직권남용죄는 우선 해당 직무에 대한 권한이 있어야 하고, 이를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성립된다. 앞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연루된 다른 법관들 사건에서도 법원은 피고인에게 권한이 없어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며 대부분 무죄를 선고했다.
이른바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재판장 이종민)는 사건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은 계속 중인 사건에 대해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서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설령 그런 직무권한이 있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파견 판사가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사건과 관련해 외교부 입장이 담긴 보고서를 작성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해당 보고서의 목적은 재판 개입이라기보다 2012년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의 판결 이후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가능성을 검토하는 참고자료로 제공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는 피고인들의 지시라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검찰이 박근혜 정부와의 ‘상고법원 거래 대상’이었다고 주장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등과 관련한 보고서 역시 행정처에서 통상적으로 만드는 자료일 뿐 재판에 개입할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다. 청와대에 재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것은 사법행정에 미칠 파장 등을 다각도로 검토한 것이지 사건에 개입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해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 등에 대해서는 양 전 대법원장의 재량권에 속하는 일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해당 판사들의 희망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사안을 마련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광범위한 재량권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고 이를 통해 법원의 위상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련 활동 대부분이 직권을 남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다만 일부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죄로 볼 여지가 있다며 여지를 남기기도 했다. 피고인들이 파견 법관을 이용해 헌재 내부의 사건 정보와 동향을 수집했다는 대목에서다. 하지만 이는 피고인들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유죄로 판단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한 재판부에 직권취소와 재결정 의견을 전달하는 등 직접적인 재판 개입을 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다만 여기에서도 양 전 대법원장 등이 공모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외에도 통합진보당 재판과 관련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혐의, 국제인권법연구회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 탄압 관련 혐의 등에 대해서도 공모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
지금까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은 14명이다. 임성근, 신광렬, 조의연, 성창호, 유해용, 이태종 전 판사 등은 모두 무죄를 확정받았다. 심상철, 방창현 전 판사도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유죄 선고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두명 뿐이며, 대법원에 상고심이 계류 중이다.

특히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다음달 5일 1심 선고를 앞둔 임 전 차장에 대한 법원 판단에 관심이 쏠린다.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 대부분은 ‘임종헌 전 차장 등에게 위법·부당한 일을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가 임 전 차장의 일부 행위에 위법성이 있다고 지적한 만큼 해당 재판부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된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