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재판 개입·연구회 와해 시도 있었지만 양승태가 지시 안해”

이혜리·김혜리 기자 2024. 1. 26.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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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원 기자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26일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는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기 법원행정처가 일선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 독립을 침해하는 행위를 한 것 자체는 일부 인정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이 이를 지시하지 않았다거나,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면서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법원장이 갖는 법관 인사권의 재량 범위를 넓게 규정해 법관에 대한 인사 불이익도 정당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법원행정처가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한 재판부에 직권취소와 재결정 의견을 전달한 것을 재판 개입이라고 판단했다. 대법원 사건 중에서는 매립지 귀속 분쟁과 관련해 법원행정처가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에게 쟁점에 관한 법원행정처 의견을 전달한 것이 재판 개입이라고 인정했다.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의 경우 직접 재판에 개입하려 한 사실이 인정됐다. 2016년 윤인태 당시 부산고등법원장에게 연락해 비위 의혹 법관이 연루된 사건 선고를 미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재판부는 “재판부가 전적으로 결정해야 할 선고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재판부에 전달해달라고 요청한 사항은 재판 개입이 명백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소속 심의관들이나 일선 법원의 수석부장판사에게 특정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부에 대한 법리 전달, 재판부 심증 파악 등 일종의 재판 개입성 행위를 시킨 것은 직권의 남용에 해당한다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2015년 조한창 당시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에게 서기호 전 의원의 소송과 관련해 ‘추정된 소송 심리를 진행하라’는 취지의 요청을 하고, 통합진보당이 제기한 행정소송과 관련해 ‘각하는 부적절’이라는 취지로 전달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런 재판 개입성 행위를 모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주도했다고 봤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전체적인 방침 속에서 이들이 움직였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성 행위를 지시했거나 보고받았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했다. 임 전 차장과 이 전 상임위원이 스스로 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앞서 재판 개입 혐의를 받은 임성근 전 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논리였던 ‘권한 없이 남용 없다’를 적용했다.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직권’이 있어야 하는데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애초에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원 기자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대법원 정책을 비판하는 학술대회를 준비한 국제인권법연구회 위축을 위해 방안을 마련한 사실은 인정했다. 재판부는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의 주된 목적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에 있었지만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의) 비판과 반발을 줄이기 위해 이런 목적을 숨기고 예산의 공정한 배분 등을 내세웠다”며 “이는 법관의 표현·연구의 자유를 침해해 위법하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것도 양 전 대법원장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2017년 일정파일에 “인사모 CJ보고(강경대응 주문)” 등이 기재돼 있지만 이 전 위원의 법정 증언이 모호하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도 진술을 거부해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와 학술대회 개최 저지를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시에 중복가입 해소조치까지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법관에 대한 인사권자라는 점에서 법관 불이익 혐의는 이 사건의 주요한 쟁점이었다. 대법원 정책에 반하는 판사들을 이른바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법원 내부통신망에 단순히 법원 이슈를 비판하는 글을 올린 판사도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해 인사 불이익을 줬다며 법관 독립 침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관의 인사원칙과 기준을 명시적으로 규정한 법령이 없다면서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광범위한 재량이 인정된다고 했다. 소위 ‘인사패턴’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관행일 뿐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 유무를 ‘권한이 있는가’ ‘권한이 있다면 그 권한을 남용해 의무에 없는 일을 시켰는가’ ‘법원행정처의 권한남용을 공모했는가’로 나누어 따졌다. 그 결과 어떤 혐의는 ‘권한이 없으니 권한남용도 없다’고, 어떤 혐의는 ‘권한은 있으나 권한을 남용하지는 않았다’고, 어떤 혐의는 ‘법원행정처의 권한남용은 있었으나 양 전 대법원장 등은 공모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이렇게 해서 양 전 대법원장 등은 47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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