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무리한 기소"… 사법권위 추락·국론분열, 대가는 혹독했다
법원 "檢 증거론 증명 안돼"
'조선제일검' 한동훈이 주도
"수사권 남발"비판 못면해
檢 "판결 분석후 항소 결정"
◆ 양승태 무죄 ◆
"피고인 양승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사법부 수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정조준한 '사법 농단 의혹' 사건에서 1심 법원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에 넘겨진 지 약 4년11개월 만이다. 자신을 향했던 주요 혐의들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만큼 양 전 대법원장은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재판이 약 5년간 이어지면서 그와 대한민국 사법부에 찍힌 '적폐'라는 낙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사법적폐 청산'이라는 자체 명분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부터 무리하게 수사를 진행하면서 국론 분열을 야기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수사팀을 지휘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도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 전망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부장판사 이종민) 심리로 26일 진행된 사법 농단 의혹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 전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강제징용 재판 개입 등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하며 직권을 남용한 혐의,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기 위해 헌재 내부 정보를 유출한 혐의, 특정 판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기 위해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 모두를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이번 의혹의 핵심은 직권남용 성립 여부였다. 양 전 대법원장이 실제로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 다른 판사들의 사법권을 침해했는지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직권을 남용한 사실이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직권남용이 성립하려면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상 어떤 판사에게도 이 같은 권한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날 재판부는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을 다루면서 "특정 법관에 대한 양 전 대법원장의 인사권 행사 사실이 인정되나 일부 판사들은 물의 야기 보고서에 검토 대상으로 포함되지 않은 점 등에 비춰 볼 때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양 전 대법원장이 직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여러 사정을 보면 보고서 내용이 사법행정의 한계를 넘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설령 피고인들의 직권행사가 인정된다고 가정해도 합리적 의심 없이 직권을 남용했다고 볼 만큼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 없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2018년 6월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재배당하면서 사법 농단 의혹에 대한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필두로 '조선제일검'으로 불린 한 위원장이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로 수사팀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전현직 고위 법관들을 비롯해 양 전 대법원장까지 검찰 조사를 받고 수감되면서 사법부 수장이 구속 기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후 약 5년간 이어진 재판에서는 줄줄이 무죄 선고가 나왔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전현직 판사 14명 중 2명만 유죄 선고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은 임성근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검찰은 징역 2년을 구형했지만 2020년 2월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결국 이날 사법부 수장인 양 전 대법원장을 겨냥한 재판 1심에서마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가 나오면서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다시 한 번 도마에 올랐다. 특히 검찰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투입됐음에도 무죄 판결이 잇따르자 '공정 기소 원칙'을 지켜야 할 검찰이 오히려 수사권을 남발하면서 무리한 기소에 매몰됐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이날 선고 이후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은 "1심 판결의 사실 인정과 법리 판단을 면밀하게 분석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법정을 급하게 빠져나간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부의 명쾌한 판결에 감사드린다"면서도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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