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어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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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늦은 저녁 내게 전화해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조카는 내 집에 놀러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책장인 게 좋아요"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나는 준비한 말들을 전부 지워버리고 서재로 들어가 조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이것저것 골랐다.
그것이 내가 조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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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늦은 저녁 내게 전화해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뭐가? 내가 묻자 언니는 대뜸 한숨부터 쉬었다. 전화 통화인데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근처를 검지로 꾹 누르고 있는 언니의 구겨진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후 언니가 한 이야기는 내가 들어도 내 탓 같았다. 그러니까 조카가 고3이 된 지금 돌연 진로를 바꾸겠다고 한 이유가 말이다.
애초에 조카의 희망 진로는 간호학과였다. 이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19 때문이었는데, 보호자 출입조차 금지된 병원에서 혼자 맹장 수술을 받아야 했던 어린 조카는 자신을 성심성의껏 돌봐준 간호사들에게 깊이 감화된 상태였다. 그동안 조카는 간호학과 진학을 위한 단계를 착착 밟아나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작가가 되겠다지 뭐야." 설명하는 동안 점점 건조해진 언니 목소리가 기침을 삼키듯 가팔라졌다. "문예창작과에 가겠대. 그러면 생기부 전형은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데도."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 큰일이었다. 그게 입시전형 중 하나라면 더더욱 그랬다.
조카는 내 집에 놀러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책장인 게 좋아요"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조카가 보기에 내 삶이 너무 느긋해보였을까. "네가 애랑 얘길 좀 해봐." 언니가 말했다. 아무래도 글 쓰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험난한지 있는 대로 겁을 줘 간호학과 지망생으로 돌려놓는 게 내 역할인 듯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글 쓰는 삶을 선택한 뒤 내가 느꼈던 고립감과 고독감, 경제적 어려움과 열패감은 지어낼 필요도 없었다. 조카는 아직 모를 것이었다. 빼곡히 꽂혀 있는 저 책들에 내가 어떤 압박감을 느끼는지.
언니가 조카를 데리고 집에 왔을 때 나는 사뭇 긴장한 상태였다. "이유가 뭐야?" 내가 묻자 조카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진짜 열심히 생각해봤더니 답이 이거였어요." "창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권위적인 목소리를 연습했고, 시행착오와 실패를 수없이 경험한 사람 특유의 고집스럽고 피로한 표정을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지어봤다. 그런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카가 말했다. "알아요. 엄청 힘들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거라면 힘들게 준비하는 과정까지도 전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카가 막연히 미래의 행복에 대해 말했다면 내겐 얼마든지 반박할 말이 있었다. 그런데 미래에 가닿기까지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난까지 포함한 행복이라니. 나는 새삼 골격이 단단해진 조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난을 각오할 줄 아는 나이라면 정말이지 다 큰 것 아닐까. 나는 준비한 말들을 전부 지워버리고 서재로 들어가 조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이것저것 골랐다. 몇 권의 책과 함께 덕담을 건네는 일. 그것이 내가 조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어쩌면 어른의 역할은 거기까지인지 몰랐다. 아이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의 고단한 걸음을 다만 가까이에서 지켜봐주는 것 말이다. 언니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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