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영의 칵테일 파티] 자주적 편성권의 황금시대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1. 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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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작품을 고르느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작품은 500원이면 2박3일 동안 빌릴 수 있지만, 최신작은 많게는 3000원까지 받는데다가 대여 기간도 1박2일로 짧았다.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감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작품 목록을 넘겨보느라 많은 시간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프라임 시간대'가 따로 없는 OTT에서 자기 시간표를 만들어 최우선 작품을 끼워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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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작품을 고르느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작품은 500원이면 2박3일 동안 빌릴 수 있지만, 최신작은 많게는 3000원까지 받는데다가 대여 기간도 1박2일로 짧았다. 빌려온 작품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아 이틀 내로 못 보면 3000원을 그대로 날리거나, 일당 500원의 연체료를 내야 했다.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대여점에서 고민하는 시간은 인생에서 지워졌다. 넷플릭스 등 다양한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등장하면서다. 월 이용료만 지불하면 신작을 보든 고전을 고르든 추가로 내야 할 돈은 없다. 빨리 반납하라고 독촉 전화를 거는 주인아저씨도 없다. 취향에 맞는지 미리 탐색할 필요도 줄어들었다. 직접 본 뒤 재미없으면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넷플릭스 이후의 감상이 더 풍요로워졌냐면 꼭 그렇지는 않다.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감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작품 목록을 넘겨보느라 많은 시간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어떨 땐 실제 감상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콘텐츠의 바다를 헤맨다. 한참을 그러고 나면 후회하곤 한다. 차라리 아무거나 하나 골라서 봤다면 시간을 더 알차게 보냈을 텐데.

OTT에 널린 여러 작품 중 하나를 고르기 어려워하는 마음을 두고 '선택 과부하 효과' 같은 용어가 동원되는 것을 보면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무한한 시청을 허락해주면 작품 감상 폭도 무한히 넓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러 번 선택해도 돈이 들지 않으니 외려 무한히 포기한다. 처음엔 별로였는데 끝까지 보고 나니 명작이었다는 '의외의 발견'도 적어진다.

넷플릭스가 성공한 이유는 이처럼 광범위한 콘텐츠를 확보한 것과 더불어 편성을 파괴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TV를 볼 때 시청자는 편성PD가 짜둔 프로그램 순서를 따라가야 하고, 영화관에서는 프로그래머의 작품 선별을 따라가야 한다. OTT는 편성하지 않는다. 무엇을 언제 볼지 OTT는 관여하지 않는다. 요금제에 따른 시청권을 줄 뿐이다.

다만, 이것을 '편성의 종말'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편성권의 이동'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기존엔 방송국과 영화관, 신문사가 가졌던 편성권이 이제 시청자와 관객, 독자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소비하겠다는 태도로 콘텐츠의 숲에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고 만다. 시청자는 '프라임 시간대'가 따로 없는 OTT에서 자기 시간표를 만들어 최우선 작품을 끼워 넣어야 한다. '톱·사이드·하단'이 존재하지 않는 포털 뉴스에서 우선순위를 설정해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스스로 편성PD이자 영화관 프로그래머, 편집국장이 돼야 하는 것이다.

구독경제 등 이용자에게 무한한 선택권을 허용하는 서비스가 OTT 외에도 여러 산업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이건 단순히 구독경제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편성표가 아닌 자기 취향과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주체성의 시기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콘셉트를 가지고 삶을 스스로 편성하지 않으면, 그저 무한한 선택권 속에서 표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박창영 컨슈머마켓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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