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 문화 이면] 너머의 것들

2024. 1. 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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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만 쓰는 사람이란 고정관념에
강연요청 번번이 거절했지만
한달간 강연준비하는 후배보며
성향론·체질론 얽매인 나를 발견
원하지 않는 일도 자청하며
경험해보는 데서 변화 시작

성향론과 체질론에 묶여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감스러운 상황을 많이 목격한다. 나도 그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고2 때 한문 선생님이 한자 쓰기노트 한 권을 써오는 숙제를 내주셨다. 그래도 학생이 숙제는 해야지 싶어 다 썼다. 내가 은근히 한문을 좋아하고 말이다. 그런데 제출하는 날 책상 위에 올려둔 노트를 친구가 북북 찢어버렸다. 이유가 가관이다. 한 대 맞으면 되지 사내자식이 간지럽게 이런 걸 하냐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고 한참을 넋이 빠졌다. 친구들 중에 나만 그걸 썼나보다. 그런데 저 한 권에 들인 시간과 정성이 얼마냐. 그걸 이렇게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존재에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이 떠오른 건 경상도 남자들의 무지막지함이랄까, 무뚝뚝하고 거칠고 간지러운 것은 죽어도 못하는 특유의 성향이 나에게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식적인 것은 물론이고 뭔가 인위적인 게 개입된다 싶으면 닭살이 오른다. 자기계발이랄까, 내가 더 나아지려고 투자하고 노력하는 일에는 완전히 젬병이다. 계획을 세우고, 진척과 성과를 체크하고, 부족했던 점을 분석하는 등의 일이 성향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게으르다는 건 아니다. 다만 계획적인 인간이 아닐 뿐이다.

그건 인생 경력에서 드러난다. 그 흔한 토익이나 토플도 한 번도 준비를 안 해봤고, 자격증도 자동차 운전면허뿐이다. 그러고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시대를 타고났고 운이 좋은 걸 수도 있다. 첫 직장은 대학 은사가, 두 번째 직장은 대학 선배가 소개해준 덕에 시험도 보지 않고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업력 20년 차를 훌쩍 넘어섰다.

업계에 오래 있다 보니 간혹 강연이나 세미나 발표 요청이 온다.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거절할 수 없어서 수락했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몇 번 있다.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특강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모교에 간다는 생각에 너무 들떴고 후배들을 만난다는 마음에 긴장도 됐다. 그래서 강의 전 점심으로 간단히 반주를 한다는 게 막걸리를 꽤 마셔버렸다. 예전 국문과 시절을 생각하며 그랬던 것이다. 그러고는 강단에 올라가 어슬렁거리며 내가 듣기에도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너무 악몽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한다. 그래도 뒤풀이 자리는 성대했다. 새벽까지 후배들과 어울려 잔을 기울였으니. 아무튼 이날 이후 드물게 오는 강연 요청은 아예 딱 잘라서 거절한다. '잘하려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게 괴롭다. 나는 글만 쓰는 사람이라고 못을 박는다.

최근 이런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강연을 하게 됐는데 그 준비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 친구는 인터뷰나 유튜브 출연은 곧잘 하는데 강연은 공포증이 있었다. 많은 청중 앞에서 긴장하는 것이다. 한 달 전부터 강연을 준비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어떤 자괴감에도 빠지지 않고, 강연을 무사히 마치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경이롭고 감동적이었다. 강연을 듣는 사람은 알까, 저렇게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것을. 어느덧 나도 저렇게 한번 해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모든 아이디어는 미완성인 상태로 떠올라 실행하는 피드백 속에서 완성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 내 속에 있는 실천의 리스트들은 어떤 계기나 마중물을 만나지 못하면 무너져서 사장돼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가해질 때를 기다린다든지, 무턱대고 시작부터 해본다든지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가해질 때는 결코 오지 않고, 무턱대고 덤비면 반드시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여러 번 경험해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결국 계획을 세워서 조금씩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타고난 성향이나 체질이 있다. 하지만 성향론과 체질론에 묶여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감스러운 상황을 많이 목격한다. 나도 그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내가 잘하는 것, 원하는 것에만 머무는 삶은 발전이 없을 것이다. 때로는 내가 못하는 것, 원하지 않는 상황을 자처해서 경험하는 것, 여기에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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