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극장의 꿈’ 허문 자리 추억조차 앉을 곳이 없다[허남설 기자의 집동네땅]
윤홍식씨는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건물 관리인이었다. 아침이면 극장 문을 열고 청소하며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젊은 시절 영화 구경하러 이 극장에 드나들었는데, 환갑이 넘어 그 극장을 돌보게 된 경험은 꽤 특별한 느낌을 줬다. 60년 된 아카데미극장을 보전하자는 시민들이 모여 재생 사업을 벌일 때였다. 그 사람들은 윤씨를 “반장님”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10월20일, 윤씨는 극장 지붕 아래 있었다. 지붕은 가운데가 살짝 솟은 삼각형꼴이었다.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지그재그 얽힌 다락 같은 공간에 몸 누일 자리를 폈다. 그곳에서 되는 대로 버틸 셈이었다. 처음 극장 관리인직을 제안했던 사람에게 띄어쓰기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극장옆구리가터져나갈때자리에못있겠더구만. 미안하네말릴것같아혼자결정해서.’ 그의 표현대로 굴착기가 극장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었다. 윤씨는 그 공간에서 엿새를 보냈다. 이렇게 하면 극장 철거를 막을 수 있겠거니 했다. 굴착기는 잠깐 멈췄지만 그때뿐이었다. 극장은 끝내 무너졌다.
원주 토박이인 윤씨가 옛 친구들에게 아카데미극장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을 때 심드렁한 이도 많았다. ‘대체 그 극장이 뭐라고’,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아카데미극장만 한 곳은 원주에 널렸다.” 맞는 말이다. 근현대 들어 인구가 폭증한 만큼 아카데미극장 같은 건물도 무수하게 지었다. 그중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남기지 않아도 될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아카데미극장은 1963년 강원 원주시 평원동에서 개관했다. 이 극장에 접한 평원로를 따라 원주극장(1945년), 시공관(1962년), 문화극장(1967년) 등 3개 극장이 더 있었다. 원주시민에게는 ‘C 도로’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주요 도로에 A, B, C 등 알파벳을 붙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극장이 많아서 ‘C(Cinema) 도로’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곳은 반세기 가까이 원주시민들의 문화중심지였다.
1963년 개장…반백년 ‘문화 중심’
“이것만은 지켜야” 힘 합친 시민들
미술관·책방 꾸리며 되살린 공간
원강수 시장 “주차장 건설” 철거
신도시 사업·초대형 건물에 밀려
끝내 무너져버린 ‘공동체의 기억’
2005년 원주에도 첫 멀티플렉스가 들어섰다. 지금은 모두 다섯 군데가 됐다. 멀티플렉스가 문을 열 때마다 단관극장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2015년 12월 문화극장이 철거되자 아카데미극장만이 남았다. 아카데미극장은 이미 10년째 불을 끈 채 잠들어 있었다. 이거 하나라도 남겨야 한다는 시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16년 1월 원주시의회는 원주시에 극장 보전과 활용 방안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영화인과 정치인, 시민사회 활동가, 교수, 상인, 그리고 동장까지 머리를 맞대 4년 동안 숱한 설문조사와 토론회를 벌였다. 원주시가 아카데미극장 소유주와 매입 협약을 맺은 때가 2020년 4월.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대청소로 아카데미극장 재생 사업 ‘안녕 아카데미’가 시작됐다. 극장은 책방이 되기도 했고 미술관이 되기도 했다. 시민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소가 되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2020년은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친 해였지만, 사람들은 아카데미극장에 모였다. 원주시는 2022년 1월 32억원에 아카데미극장을 사들였다.
이렇게 되살린 극장이 다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바뀌는 데는 몇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해 6월 지방선거에 당선된 원강수 원주시장의 인수위원회는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도 미비하며, 안전성 문제, 기대 이하의 활용도 예상 등 문제로 복원 필요성이 없어 보인다”며 전면 재검토를 권고했다. 2023년 들어 원주시는 아카데미극장을 허물고 인근 풍물시장 방문객을 위한 주차장과 야외공연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8월 철거 공정에 착수했다. 시민모임 ‘아카데미의 친구들’이 단식과 점거 농성으로 항의했지만, 굴착기는 3개월 만에 극장을 흔적도 없이 부쉈다.
아카데미의 친구들은 이 극장이 역사적으로 특별해서 남겨야만 했다고 말한다. 원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봐도 어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때 그 단관극장의 풍경을 거의 유일하게 간직했다는 거다. 멀티플렉스 바람이 일자 변화해 살아남기보다는 문 닫는 것을 택했던 공간인지라 오히려 한 시절을 박제하다시피 전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반면 보전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 청년상인경제협회란 단체가 있다. 이들은 “추억팔이”라고 했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재생 사업을 추진하며 시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절반 이상(56.5%)이 아카데미극장 활용법으로 ‘추억의 영화관’을 꼽았다. 그냥 이대로 남겨달라는 것. 그런데, 추억팔이를 추구하면 안 될 이유는 뭘까? 이 단체는 “리모델링에 70억원, 연간 유지관리에 10억원 이상 세금이 든다”고 했다. 그럼 혹시 오페라하우스는 어떨까? 김진태 강원지사는 지난해 12월20일 원주 혁신도시 반곡동을 찾아 약 2000억원을 투입해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했다. 이런 초대형 건축물에 이 정도 돈을 쓰는 건 좀 괜찮은가.
추억팔이가 문제라면 이런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다. 정부와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아카데미극장 매입 예산의 몇배, 몇십배를 들여 조선 같은 사라진 왕조의 문화유산을 복원한다. 가령 광화문 월대 같은 것들. 하나같이 국가나 민족의 연원을 되새기자는 취지를 동원한다. 이런 행위는 보통 강하게 지지받는다. ‘역사’는 되고 ‘추억’은 안 되나? 그것이 지닌 규모나 시간만 다를 뿐, 공동체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보전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복원과 보전은 오페라하우스보다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도시에 전한다.
“명절 때 극장 앞에 허공을 가로질러 만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그 앞에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비로소 명절 분위기가 났다.”
“영화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극장 안에는 사람들이 빼곡했고 우린 2층 맨 뒤에 서서 볼 정도로 인기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그날 영화관에 합동 순찰이 나올 줄이야….”
(책 <먼지 쌓인 극장에 불을 켜다>(2017) 중)
광화문 월대는 왕의 길을 땅보다 한 단 높여 신민의 길과 구분한 구조물이다. 이걸 가리켜 “임금과 백성이 만나 소통하던 장소”라고 과장하는 말이 한때 나돌았다. 아카데미극장에 얽힌 동네 어른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보다 명분이 약할 이유가 뭘까? 어떻게 보면 신도심을 잔뜩 지어놓고, 원도심에 수십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업신여긴 게 진짜 문제다.
그래서 대체 무엇을 남겨야 하느냐고? 반드시 보존해야 할 특별한 건물은 없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특별한 건 그 건물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30대 최은지씨는 다시 문을 연 아카데미극장에 처음 발 디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는 “딱 들어가자마자 할머니 집 같은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공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윤홍식씨는 아카데미극장 관리인 시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많은 사람이 이곳을 추억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물건이구나’.
또 확실한 건 이런 공간이 사람과 사람을 엮는다는 거다. 아카데미극장은 세상에 없지만, 아카데미의 친구들은 남았다. 책 읽는 모임 ‘아카데미 책방’, 영화 보는 모임 ‘유성라사의 영화교실’을 연다. 최은지씨는 지난해 10월28일 아카데미극장을 지키겠다며 옥상에 올라 사흘 동안 찬 바람을 맞았다. 원주시와 철거업체가 고발한 시민 26명 중 한 명이다. 그는 말한다. “어쨌든 지난한 과정을 보내며 남은 건 결국 사람이었고, 제가 지키고 싶었던 것도 결국 이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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