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밀어내고 나를 드러내야 이기는 세계...시인은 '사라짐'으로 답했다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글을 씁니다.
뒤로 물러서 있기 /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 빛나기
- '은(銀)엉겅퀴'
옛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1933~)의 시는 늘 간결하고 아름답다. 은(銀)엉겅퀴는 “민들레처럼 낮은 키에 딱 한 송이 흰색 꽃”이 핀다('은엉겅퀴', 출판사 봄날의책 번역본). 소박하고 평범한 들꽃이고, 경제적 가치에 따라 식물의 위계를 나누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잡초’이다. 그런데 시인이 보기에는 조심성과 사라짐의 미학을 알고 있는 꽃이다. 시는 일종의 반(反)현대적 아름다움을 지닌 식물 예찬으로 여겨지고,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 잡사에서 한발 물러선 겸손한 수도자의 태도를 말하려는 것 같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태도는 우주 창조의 순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자위는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에서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모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그리스 사상에서 기원하는 ‘유출’ 모델로, 이 세계가 신 또는 무한자의 선한 자기표현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에서 나왔다. 전능한 존재가 자기 밖으로 흘러넘치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활동에서 모든 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유대교의 카발라 사상에서 나온 ‘침춤(tsimtsoum)’ 또는 ‘수축’ 모델이다. 무한자가 세계를 창조하면서 유한자가 거처할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만물에 가운데 자리를 내주고 자신은 가장자리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신학자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들에게는 종교적 태도란 두 가지를 다 뜻한다.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물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서정시 쓴다고 대학서 쫓겨난 자물쇠공
현대인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피에르 자위의 말처럼 “모든 세계가 눈에 띄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는데 어떻게 이 와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처신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선전은 확실히 현대적 현상이다. 어느 세기의 사람들도 우리처럼 개인 생활의 모든 면면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느라 분주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드러내기를 즐기는 만큼이나 드러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드러남으로 인해 타인의 눈요기나 악의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 눈길들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어떤 이들은 죽음 속으로 사라지길 택한다. 물론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생각한 예술가도 있긴 하다. 앙드레 브르통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있는 “유리집”에서 살고 싶어 했다. 아마도 이 시인은 인류 전체와 사랑에 빠진 상태였던 것 같다. 나의 전부를 비밀 없이 상대와 나누고 싶고, 또 상대의 전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을 막 시작한 연인들에게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없이 지속될 경우엔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이 투명성이 오래된 유토피아(신이 내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시는 곳)의 특징이면서 현대적 삶의 가장 무시무시한 양상이라고 말한다. 투명성의 법칙에 따르면 국가적인 일들은 점점 불투명해지는 반면 사적 개인들은 자신의 건강 상태, 재정 상태, 가족 상황을 남들에게 제공하는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매스 미디어의 판결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 내리기만 한다면 그는 심지어 사랑, 질병, 죽음에 있어서조차도 단 한순간의 내밀한 순간도 찾을 수 없게 되고 만다.”('소설과 우리들의 시대')
인간은 항상 타인과 자기 자신을 위해 수축과 후퇴를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물러섬과 드러내지 않음은 타자를 배려하는 미덕인 한편, 드러내기 문화에 반하는, 가장 현대적인 저항의 태도가 된다. 시인은 '한 잔 재스민 차에의 초대'에서 나지막이 말한다. “들어오세요, 벗어놓으세요, /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고요하게 있어도 된다는 이 부드러운 시구는 마치 산사의 선방에 초대받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시집의 번역자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동독 시절 사람들은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항의 표시로 이 시를 집의 문 앞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모두가 똑같은 목소리로 위대한 사회주의자임을 증명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침묵은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결단의 행위가 된다.
쿤체는 대학에서 철학과 언론학을 공부하고 강의를 시작했지만 ‘애정시’를 쓴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계급투쟁 의식이 없는 사람은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 것이다. 물론 당국에 반성하고 개심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대학에 남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타협하는 대신 그곳에서 물러났다. 그후 자물쇠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계속 시를 쓰다 1977년 옛 서독으로 망명했다. 훗날, 동독 정보부가 쿤체에 대한 정보를 모아놓은 3,500쪽 분량의 감시 파일이 공개되었는데, 파일명이 ‘서정시’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추방의 이유가 되었다니!
서독 망명 후 목격한 '팔꿈치 사회'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멈추는 것 역시 물러서기, 드러내지 않기의 미학이다. 그것은 튀면 욕먹는다는 비겁한 처세주의와 다르다. 또 사는 동안 영원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은 드러내기와 드러내지 않기의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살아갈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억압 속에서도 용기 내어 진실을 말하는 것을 ‘파레시아(parrhesia)’라고 불렀는데 획일적인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 강요된 발언을 거부하고 침묵하는 것 또한 파레시아만큼이나 용감한 행위이다.
쿤체는 서독으로 망명한 뒤에도 체제 옹호적인 작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의 획일성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만큼이나 자본주의의 획일성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늘이 땅을 끌어당긴다 / 돈이 돈을 끌어당기듯 //(……) // 인간은 / 인간에게 / 밀쳐내는 팔꿈치”('뒤셀도르프 즉흥시') 뒤셀도르프는 산업이 흥성한 서독의 대표적인 부자 도시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이른바 ‘팔꿈치 사회’를 목격한다. 그것은 자기가 앞서기 위해 타인을 팔꿈치로 밀쳐내야만 하는 경쟁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드러내기란 얼마나 비싼 것을 먹고 입는지, 얼마나 비싼 데 사는지를 과시하는 일, 소유와 소비의 경쟁적 과시와 동의어가 된다.
피에르 자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인정을 받기 위한 끝없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연대감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드러내지 않는 처신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게 공간과 시간의 일부를 내어주며 그를 돌볼 때 그 역시 우리를 돌본다. 시인은 한 지인이 키우는 반려견에게서 이런 진실을 새삼 발견한다. 인간이 작은 개에게 자기 곁을 내어주면서 요청한다. “작은 개는 위험을 무릅쓰고 / 몸을 던지거라, 허공에서 / 빙그르 돌며 / 제 주인이 / 곁으로 뛰어와 주기를 기다리며 // 보여주거라 / 작은 개는 공감을 /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하거라.” 시인은 이 사랑을 받기 위해 “주인이 치르는 대가”는 “그 작은 개의 개가 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작은 개가 그 곁을 내주며 돌봐 주는 반려동물일 뿐이다. 이 동물이 작은 개에게 간절히 희망하는 것은 한 가지다. “뛰어올라 주었으면, 친구, 작은 개여 / 외로움의 / 목젖까지”('작은 개')
작은 개가 한 외로운 인간에게 보여 주는 우정을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보이는 일이 어찌 그리 힘든지. 이스라엘은 가장 유대적인 유산인 카발라의 침춤 사상을 망각했다. 무한자도 한갓 유한자인 인간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수축시키는데 한 인간 종족이 다른 인간 종족에게 곁을 내주고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일까. 드러내기 문명의 그림자 속에서 가장 빛나는 건 아무래도 인간의 야만인 것 같다.
* 피에르 자위의 말은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이세진 옮김, 위고 발행)에서, 밀란 쿤데라의 말은 '小說(소설)과 우리들의 時代(시대)'(권오룡 옮김, 책세상 발행)에서 인용했다.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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