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상간 매몰되지 말고 이면 봐주길…”
● 캐스팅 기준은 안정성과 의외성
● 슬럼프에 빠져 자학하며 글 쓰기도
● ‘신나면 망한다’가 좌우명
"‘가족' 하면 긍정적 의미로 통하지만 이중성을 갖고 있죠. 근친상간은 가족의 이중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쓰였어요. 근친상간에만 매몰되지 않고 이면을 봐주면 좋겠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선산'을 기획하고 각본에 참여한 연상호 감독은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 소재를 사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월 19일 공개된 '선산'은 존재조차 잊고 지내던 작은아버지가 사후 남긴 선산의 상속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그린다. '부산행', '염력', '반도' 등 연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활약한 민홍남 감독이 처음 연출한 작품이다. 넷플릭스가 1월 24일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 4위, 한국에서는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기획한 것은 10년이 넘었어요. 그때는 유교를 중시하는 사회적 여건상 투자받기가 어려웠는데 넷플릭스는 전 세계 온라인망으로 공개하는 구조다 보니 우리와 다른 판단기준으로 시장성을 전망하고 제작을 지원했어요."
‘연니버스' 파급력의 비밀
"넷플릭스 작품을 많이 하긴 했어요. 앞으로 공개할 것도 좀 많고(웃음). 넷플릭스가 여유가 있는지 제 얘기를 좀 잘 들어주더라고요. '선산' 같은 작품도 사실은 리스크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감사하게도 해볼 만하다고 여기더군요. 그렇다고 크리에이터를 존경하는 분위기는 아니에요. 대신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자율성을 보장하는 여유가 있죠."
연 감독은 충무로가 인정하는 다재다능한 인재다. 걸어온 이력도 독특하다. 대학(상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졸업한 후엔 순수미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1997년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으로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딘 후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서울역'(2016) 정도다. 연 감독을 널리 알린 작품은 실사 영화 데뷔작인 '부산행'(2016).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첫 좀비 영화다. 이후 그는 드라마 연출과 극본을 맡고 그래픽 노블 집필까지 직접 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친다.
-‘선산'에 출연한 배우 김현주, 류경수와 여러 작품을 같이 했다. 두 배우를 평가한다면.
"김현주 배우와 드라마 '지옥' 영화 '정이'를 했고 촬영이 끝난 '지옥2'까지 포함하면 네 작품을 했다. 무엇보다 얼굴이 여러 가지라는 것이 장점이다. 작업을 할 때마다 느낀다. 현장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철저히 준비해온다. 그렇기 때문에 민홍남 감독도 첫 연출작 주연으로 믿고 맡겼다. 류경수는 도전을 좋아하는 배우다. 무언가를 두려움 없이 표현하는 느낌이 있다."
-캐스팅 기준이 뭔가.
"캐릭터와 맞는지를 1순위로 고려한다. 그다음에 어울림과 의외성 두 개를 놓고 고민한다. 배우가 5명이면 3명은 안정성, 몇몇 명은 의외성을 추구하는 식으로 안배한다. '반도' 구교환, '지옥' 김신록 배우가 의외성을 담당했다."
노력으로 안 되는 일엔 관심 꺼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고 싶었는데 과를 잘못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 전공은 디자인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를 거의 안 가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졸업하고 바로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업했다."
-작가, 애니메이터, 연출가로 저글링을 잘하는 것 같다. 비결이 뭔가.
"잠을 밤에만 10시간 넘게 자고, 심지어 낮잠도 잔다.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작업에 집중하려고 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핸드폰에다 적는다. 전혀 구체화되지 않는 아이디어고 그냥 느낌 같은 수준이다. 먼지가 굴러다니다 덩어리가 되듯이 그것들이 어느 순간 이야기 소재가 된다. 발전하지 않으면 그 상태 그대로 두고 다른 것에 관심을 쏟는다. 방치했던 것도 나중엔 쓸모 있어지는 시기가 온다. 내가 한 드라마와 영화 소재 중에 그런 것이 많다.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만화나 드라마 영화 등 제작 환경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구현한다."
-슬럼프를 경험한 적이 있나.
"많다. 2011년 '돼지의 왕'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왔을 때 가장 심하게 겪었다. 다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어서 심각한 우울감에 빠졌다.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못 쓰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더랬다."
-어떻게 극복했나.
"계속 뭔가를 썼다. 쓰는 게 너무 안 돼 자학을 글로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왜 이럴까를 글로 쓰면 내가 사로잡혀있던 상념이 옮겨가는 느낌이 든다. 지금도 가끔 그걸 보는데 정말 찌질하더라. 근데 그게 슬럼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 효과를 알기 때문에 힘들고 일이 잘 안 풀릴 땐 그냥 마구 쓴다. 나는 망했다, 이게 공개되면 더는 영화를 못 하겠다는 마음으로 대본을 쓸 때가 거의 80%는 될 거다."
-인생의 지침으로 삼은 좌우명이 있나.
"‘신나면 망한다'다. 일희일비를 경계한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궁금하다.
"MBA 선수들 인터뷰를 보면 마인드 컨트롤의 끝판왕 같다. MBA 선수들은 평정심을 잃으면 공이 안 들어간다. 마이클 조단이 이런 얘기를 했다. 승패처럼 자기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아예 갖지 않는다. 내 관심사는 슛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 전부다. 본인이 공을 잘 넣어도 경기에서 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내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엔 관심을 끊는다. 흥행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숨을 못 쉬겠더라. 만화 작업을 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영화는 투자가 안 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만화를 그리고 쓰는 일은 내가 노력하면 할 수 있지 않나."
적당한 존중과 조롱 받으며 롱런하고파
-드라마나 영화보다 만화에 애착이 가나."가장 애착이 가는 건 영상 작업인 것 같다. 어쨌든 영상 작업으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영상 작업에서 승부를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10년 정도 지나서 어떤 평가를 받고 싶나.
"‘돼지의 왕'이 나왔을 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적당한 존중과 조롱을 받으면서 작업을 오래 하고 싶다고 답했는데 진짜 딱 그렇게 살고 있다. 10년 뒤에도 그렇게 살고 싶다, 지금처럼."
-앞으로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를 떠올린다면.
"독립영화를 가만히 보다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배우가 있다. 그런 배우와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느끼는 편이다. 영화 '반도'(2020)의 구교환, 드라마 '지옥'(2021)의 김신록 배우가 그런 경우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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