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윤공희 대주교 “5.18이 주교로서 나를 살려줬다” [영상채록5·18]
# 윤공희
1924년생
1950년 사제 수품
1963년 주교 수품
1973년~2000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100세입니다. '건강하실까', '인터뷰를 잘 진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 선 게 사실입니다. 윤공희 대주교의 거처는 광주가톨릭대학교 안에 있는 주교관입니다. 난생 처음 주교관이란 공간에 들어섰습니다. 반백의 비서 수녀님, 엔다 수녀님이 2층의 응접실로 취재진을 안내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꼿꼿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걷고 말했습니다. '100세'라는 세상에서의 나이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조금 큰 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5.18의 증인 윤공희 대주교와 약 2시간의 대화를 여기 풀어놓습니다.
윤 대주교는 고향이 평안남도 진남포입니다. "고향이 이북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남녘으로 내려오게 됐습니까?" 첫 질문에 답변이 길어졌습니다. 곡절이 많았습니다. 젊은 사제는 숙청과 종교 탄압을 피해 죽음의 사선을 넘었습니다. 당시 흔했다는 남한 간첩의 도움을 받아 남녘으로 넘어온 과정을 어제 일처럼 풀어놓았습니다. 70년도 더 된 일을 사람 이름과 장소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설명하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한마디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구사일생'입니다. 3.8선을 넘어 개성 바로 위 '토성역'에서 기차를 타니 카라멜을 팔더랍니다. "아! 자유로운 세상에 왔구나"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함남 덕원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시작해 36분 만에 끝났습니다. 주교께 물 한 모금을 권했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비켜 가는 사제가 바로 나로구나"
5.18 얘기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윤공희 주교는 수원교구 교구장을 거쳐 1973년부터 제7대 광주교구 교구장을 맡았고, 대주교로 승품했습니다. 1963년 39살의 나이로 주교로 승품한 지 10년 만입니다. 그 몇 년 뒤 윤공희 은퇴할 생각을 품었다고 말했습니다. ''힘들고, 지루한 감이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제의 깊은 내심, 그 사정이야 다 헤아릴 수 없는 일입니다. 사임원을 낼 것을 고민하다가 5.18이 터졌다고 말했습니다. "광주 민주항쟁이 주교로서 나를 살려줬다고 할 수 있어." 사제로서의 삶을 다잡게 된 5.18의 경험을 다시 따라가 봤습니다.
그리고 5.18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 광경을 들려줬습니다. 당시 윤공희 주교의 집무실은 현재 5.18 기록관이 들어선 가톨릭센터 6층이었습니다. 5.18의 현장 금남로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1980년 5월 19일 아침의 얘기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신사복을 입었는데, 피가 나요. 목덜미도 피가 나고, 몽둥이로 맞아서... 저 사람 데려가서 구급 조치를 해야 하는데... 겁이 나서 못 내려갔어. 내려가면 나도 때릴 것 같고, 무서워서 못 내려갔어요. 복음 말씀에 강도 맞은 사람, 쓰러진 사람 보고도 옆으로 지나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구나. 양심에 죄책감을 느꼈어요."
윤공희 대주교는 종교인으로서 5.18에 관여하고 참여하게 됩니다. "(전남)부지사한테 전화가 왔어요. 광주의 어른들이 이 사태를 수습, 의논하기 위해 모여있는데 좀 와달라" 가보니 조비오 신부가 있더랍니다. 조비오 신부에게 일임을 하고, 이기홍 변호사도 있고 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부지사를 신임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일이 될 것 같지도 않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윤 대주교는 수습위원회가 안정적으로 활동하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전남북 계엄분소장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1980년 5월 22일로 추정됩니다.)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지 마시오. 군인들이 처음부터 험악하게 그런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거니까. 그것부터 인정하고 일을 수습하려는 노력을 하시오" (소준열 씨는 1988년 12월 19일 청문회에서 윤공희 대주교와의 통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수습위원들의 의견을 아주 신중하게 받아들여 달라고도 했습니다.
■ "5.18 사형수, 다 사면해 달라"
그러나 알다시피 역사는 비극으로 흘렀습니다. 5.18은 잔인하게 진압됐습니다. 광주대교구 신부 9명도 당시 보안수사대로 끌려갔습니다. '내란 음모죄'를 인정하라는 서명을 마다한 대주교의 활동은 5.18 주동자로 사형 선도를 받은 이들에 대한 사면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수환 보고 내가 그랬어요. 내가 전두환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이 동의를 했고, 군정 신부를 통해 연락을 넣어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이후 보도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같이 만난 걸로 나왔지만 혼자 만났다고 했습니다. 독대한 자리에서 꺼낸 말은 "다 사면해 주십시오" 돌아온 말은 "대통령이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였습니다. 실망을 하고 돌아왔지만 다음 날 전화가 걸려왔더랍니다. '사면 될 거다. 12시 라디오 발표될 거다'. 사형수들에게 다 무기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광주 방문… "정부에서 금남로 가는 걸 꺼려서 그걸 피했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광주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곳은 무등경기장으로 정해졌습니다. 당시 윤 대주교는 교황 방한 준비 주교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뒷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코스를 금남로로 정했는데, 정부 쪽에서 꺼려 해서 피했어. 저쪽 소방서 뒷길(이) 경비 취약지구라고 그런 핑계대가지고. 금남로 안 돌고 직접 무등경기장으로 가서 서운했어요." "로마에서 준비해왔던 그 분이 그런 걸 어떻게 알고는 만약 이걸 변경하려면 공식적으로 항의하겠다고. 그걸 뭐라고 그러겠어요. 그래서 그대로 수순이 됐죠.… 금남로 쭉 가는데 시민들이 꽉 차 있는 겁니다. …(로마에서 온) 비서 주교님이 그리스도교 나라 아니냐고 그래."
지금은 44년이 흘렀지만, 그때는 단 4년이 흐른 시점.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못 한 때 교황의 광주 방문에 광주는 들떴고 또, 숨죽였습니다. 교황이 어떤 광주에서 어떤 얘기를 했는지, 시민들 반응은 어땠는지 물었습니다.
(교황이) 강독을 하면서 용서에 대해서 했어. 용서에 대해서. 광주항쟁을 생각하고 하시는 말씀이죠. 나중에 시민들은 "아, 뭐 (책임자들은) 잘못하고 사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용서하느냐"고. "용서는 우리가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거고, 정의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정의를 세워가면서 이것(용서)을 계속 할 수 있고 해야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이에요.
■"광주 민주항쟁이 주교로서 나를 살려줬다고 할 수 있어."
5.18은 윤공희 대주교의 삶에 어떤 변곡점이었을까? 윤 주교는 5.18 이후 광주 시민들이 마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광주에 대해서 바른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래도 대놓고 얘기하는 본인을 두고 '광주의 대부'란 말까지 나온 것에 대해 '과분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광주 민중항쟁이 주교로서 나를 살려줬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은 큰 시련이야. 큰 시련이고 아픔인데, 이런 걸 통해서 역사적인 교훈을 우리가 받을 수 있어야 할 것 같어. 어떠한 권력이든지 폭력으로 권력을 만드는 건 정당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책임을 받아야 행사되는 것 아닌가. … 역사적 비극을 잊어버리면 그것이 다시 반복될 수 있어. 그래서 우리가 5.18도 잊지 말아야죠."
마지막으로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100세 어른으로 뭇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여쭸습니다.
"인간의 삶이 참 귀중한 것입니다. 참 귀중한 것이죠. 내가 인간으로서 태어난 거, 그거 절대로 무의미한 일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 인간의 삶의 귀중함, 인간의 존엄함, 이것을 모든 사람이 항상 마음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긴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 길, 윤공희 대주교는 마당까지 배웅을 나왔습니다. 강아지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광주의 대부', '시대의 증인' 윤공희 대주교의 건강을 빕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5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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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호 기자 (menbal@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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