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존중해야 할 필사본 문화유산[살며 생각하며]
‘북학의’‘열하일기’‘이재난고’
저술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
“저자 친필 확인 어렵다” 이유
문화유산 지정 대상에서 빠져
실학자 수고본 홀대 안타까워
보존가치에 대한 인식 개선을
박제가의 ‘북학의’를 완역해 재출간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현존하는 필사본 10여 종을 모두 수집해 정본을 만들고 번역해 냈다. 정본을 만들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저자가 친필로 쓴 수고본(手稿本)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줄은 알았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볼 수가 없어서 못 본 채 정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두고두고 아쉬웠다.
바로 그 수고본을 몇 해 전에 보고서 감격에 겨워했는데, 이제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돼 관람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박제가가 또박또박 정성을 기울여 쓴 원고를 보면 볼수록 감회가 남다르다. 위대한 저자의, 시대를 앞선 사상과 문장을 친필로 쓴 ‘북학의’는 보는 이를 흥분케 한다. 게다가 이 책의 뒷부분에는 박지원이 쓴 친필 서문이 수록돼 있다. 두 실학자의 친필은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짐작하게도 한다.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주장한 위대한 학자의 수고본이니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해에는 연암 박지원이 손으로 직접 쓴 수고본과 손때가 묻은 수택본(手澤本) 자료를 검토하는 학회에 참석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와 그밖에 뛰어난 산문을 엮은 ‘연암집’의 저자이다. 한국문학사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나아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의 문호이다. 그런 박지원의 수고본과 수택본 80여 책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후손가에 내려오던 책으로서, 박지원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연민 이가원 선생이 입수해 소장하다가 기증한 책이다. 작품집이 만들어지고 전해온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박지원의 작품집은 20세기에 와서야 간행됐는데 저자의 수고본을 베끼고 베낀 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간행됐다. 생존 당시부터 인기를 누리던 문호의 작품도 간행되지 못하고 백 년 이상 필사해 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출판 사정을 고려하면, 수고본과 여타 사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박지원의 수고본 역시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작년에는 또 전북 고창군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 고창 출신 실학자 이재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를 다각도로 토론하는 학회였다. 이 일기는 1738∼1791년까지 53년간 쓴 일기이자 작품집이다. 초서로 쓴 57책 전체가 저자의 친필이다. 분량의 방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후기 각종 정보의 보고이다. 전북 고창군 지역에 보관돼 있고 오래전에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됐을 뿐이다. ‘이재난고’를 들춰보면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 모든 것을 생애 모든 순간에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지 경탄이 절로 난다. 황윤석의 수고본 역시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해야 할 한국의 문화유산, 아니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18세기 실학자로 손꼽히고 사상과 문학에서 당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를 대표한다. 조선 특유의 지성과 감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런 명저가 간행되지 못하고 사본으로 남아 있다. 다른 실학자의 저술도 마찬가지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조선 후기 실학자의 위대한 저술은 대부분 출간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유수원의 ‘우서’, 이익의 ‘성호사설’, 이중환의 ‘택리지’, 유득공의 ‘발해고’,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 명성이 자자한 많은 명저가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간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 고전 중에서도 명저로 존중받을 책이다. 특히 저자의 친필 원본은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책의 내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고 자체가 우리 국민 다수가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지어진 지 몇백 년 되지 않았고, 활자로 간행되지 않았으며, 저자의 친필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등 여러 이유로 문화유산 지정의 대상에 오르지 못한 지 오래다. 이 세 사람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고, ‘북학의’와 ‘열하일기’ ‘이재난고’가 차지하는 가치를 생각한다면,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옳다. 더 나아가 세계기록유산 차원에서도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지 검토해 볼 만한 유산이다.
지난 연말에도 보물로 지정 예고된 문화재가 공표됐다. ‘예념미타도량참법’ 등 4종의 불경과 지리지 ‘여지도서’가 눈에 띄었다. 4종의 불경은 고려 시대나 조선 전기에 간행된 역사성이 오래된 전적이고, 하나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방대한 지리지로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전적이다. 모두 보물로 지정해 잘 보관하고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적이다.
이들 전적이 보물로 지정되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앞서 말한 수고본은 언제 저 목록에 올라갈 수 있을지 답답했다. 위대한 학자의 수고본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학회에서 만난 학자들은 실학자의 수고본이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는 데 하나같이 공감을 표했다. 올해부터 이전에 쓰던 문화재란 명칭이 문화유산으로 바뀌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문화유산을 대하는 시각도 확대되고 있으니 실학자의 수고본을 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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