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아메리카’에서···숨 쉴 구멍을 위해 미술관에 갔다[책과 삶]

고희진 기자 2024. 1. 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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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별세한 경계인 서경식
인문기행 시리즈의 마지막 책
슬픈 현실이 된 트럼프의 등장
무력만이 판치는 땅을 들추다
고 서경식(1951~2023).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 최재혁 옮김 | 반비 | 264쪽 | 1만8000원

2016년 3월 서경식 일본 게이자이대학 명예교수는 뉴욕의 JFK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아끼던 모자를 잃어버렸다. 미국 기행의 시작이 좋지 못하다고 느꼈다. 과거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그는 1980~1990년 사이 미국을 몇 번 방문한 적 있다.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두 형 서승과 서준식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한 인권단체 사무실을 찾았지만, 단 15분 정도의 환영밖에 받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조국의 민주화를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뒷배”였던 미국 국무부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짬짬이 미술관을 찾았다.

그의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 표지에 쓰이기도 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수틴의 초상’을 만난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디에고 리베라가 작업한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이 있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등이다. 인권운동을 해야 할 사람의 이러한 행동은 누군가에겐 안일한 여가 활동 혹은 옳지 못한 처신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도 숨 쉴 곳이 필요했다.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 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했다.”

2016년의 상황이 1980년대와 비교해 그리 낫다고 할 순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이었다. 미국을 휩쓰는 차별과 배제의 바람이 그의 이번 기행을 감싸고 있었다.

도착 당일 체코계 이민자의 자손인 소프라노 러네이 플레밍의 리사이틀을 보러 카네기홀로 갔다. 공연 시작보다 이르게 도착해 공연장 건너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에 들어갔다. 네온사인이 켜지고 저녁에서 밤으로 변해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이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스’에 등장하는 사람들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플레밍의 공연은 기대보단 아쉬웠다. 자신이 시차로 멍해진 탓일까 생각하다 플레밍도 자신도 인생의 절정기를 이미 지나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형들의 구호 활동을 돕던 시민단체와 거리가 가까웠던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그가 자주 가던 곳이다. 그곳에서 조지 벨로스의 ‘이 클럽의 두 회원’을 만난다. 링 위에서 주먹질을 하고 있는 두 남자를 구경거리 삼아 도박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그는 그림이 보여주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을 보며 조국의 독재정권을 떠올린다. 벨로스는 20세기 초 뉴욕 변두리 노동자 계급 사람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화가였다. 그는 벨로스의 그림을 보고 “드디어 미국을 그린 미국인 화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한 곳에만 머물진 않았다. 그는 미국의 여러 단체에 형들의 상황을 알려야 했고,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디트로이트도 그중 하나다. 그는 30년 전 과거의 일기를 종종 꺼내보곤 하는데 꽤 자주 “지쳤다”는 말들이 쓰여 있다. 그럼에도 “미술관에 들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일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로 그는 또 디트로이트 미술관을 찾는다.

디에고 리베라 <디트로이트 산업(Detroit Industry Murals)>. 디트로이트 미술관 북쪽 벽면. 디트로이트 미술관

디에고 리베라.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1886년 태어났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엔 리베라의 벽화가 있다. ‘디트로이트 산업’이다. 자동차 기업 포드의 2대 사장 에드셀 B 포드의 후원으로 가능했던 그림이다.

“벽화 주요 부분은 자동차 산업에 바치는 오마주다. 남쪽 벽 위편에는 누워 있는 ‘황색 인종’과 ‘백색 인종’을 그렸고, 마주 보는 북쪽 벽에는 ‘적색 인종’과 ‘흑색 인종’을 묘사했다. 남쪽 벽의 대부분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공장 내부를 그렸는데 오른쪽 끝에 위치한 거대한 기계는 아즈텍 문명의 여신 형상으로 표현했다. 모든 인종, 신과 같은 기계, 풍요로운 자연이 조화하며 공존하는 이상 세계의 비전을 보여준다. (…) 공산주의자 디에고 리베라는 이 대형 벽화가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을 향한 도전이라고도 말했다.”

서경식은 벽화를 보곤 “자본주의 문명의 유적”을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공업화 문명과 사회주의 사상 간의 결합”을 꿈꾸던 리베라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사회주의 조국 소련은 해체됐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초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서경식은 “사상가, 정치가로서 리베라는 패배자다. 하지만 나는 그런 리베라를 우습게 여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저 벽화 앞에서 나는 마치 고대 유적 앞에 섰을 때 느낄 법한 깊은 흥미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심을 품게 된다”고 말한다.

책은 주로 1980~1990년대와 2016년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서경식이 이 책을 집필한 것은 2019~2020년 사이다. 2016년 미국 여행 당시 그가 느꼈던 불안감은 한 해 뒤 트럼프의 당선으로 현실이 되었고,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를 물리적·정신적 단절로 몰고 갔다. 이후 벌어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 등 세계의 위기는 그가 더 이상 책의 집필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수틴의 초상(Chaim Soutine)>.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 ‘이상’을 잃어버리고 무력만이 살아남았다. 지금은 냉소주의가 승전가를 부르며 ‘죽음의 무도’를 추고 있다. (…) 우크라이나도 미얀마도 모두 급속하게 ‘진부한 일’이 되고 있다.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마저 이렇게 진부해져버릴 것이다. (…) 여기엔 ‘나쁜 아메리카’의 추한 민낯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물론 자국의 그런 행태에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하며 항의하는 ‘선한 아메리카’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그 힘은 열세에 몰리고 있다. (…)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2023년 12월17일 편집자에게 보내왔다는 이 책의 맺음말 중 일부다. 그리고 다음날 재일조선인 2세로 미술과 디아스포라에 관한 글을 쓰며 평생 경계인으로 살았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

책엔 2003년 세상을 떠난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그의 애통함이 담겨 있다. 서경식은 “이방인이며 고독한자들”의 “이정표나 등대처럼 유달리 높이 서 있어주던 사이드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얼마나 거대한 상실인가”라고 적었다. 서경식을 그리워하는 이들 또한 ‘거대한 상실’을 경험했을 듯하다. 이 책이 하나의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 이은 ‘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조지 벨로스 <이 클럽의 두 회원(Both Members of This Club)>.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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