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라 해도 전인류가 구원 받는다면…[북리뷰]

박세희 기자 2024. 1. 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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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김재원 옮김│은행나무
디스토피아적인 6개 단편모음
존엄·신념 등 차례로 무너뜨려
사이비 종교·창업사기·다단계
모두 행복하기 위해 시작된 것
작가 소회 담은 에세이도 수록
“개성·다양성도 결국에는 위선”
게티이미지뱅크

“저기, 나가오카, 나랑 새로운 사이비 종교 시작해보지 않을래?” 나가오카는 어느 일요일 오후,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고향 동창 이시게에게 이 같은 제안을 받는다. 어떤 물건을 사라거나 어느 모임에 함께 가자는 게 아니다. 종교를, 사이비 종교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거다. 기막혀하는 나가오카와 달리 한 차례 다단계에 빠져 친구들에게 정수기를 팔았던 사이카와는 긍정적이다. 한 달쯤 지나 다시 만난 사이카와는 하얀 셔츠에 하얀 스커트 등 전부 새하얗게 갖춰 입은, 조금 기이하면서 신비로운 교주의 모습으로 말한다. “시작은 사이비 종교라 해도 그걸로 전 세계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큰 반향을 일으켰던 ‘편의점 인간’을 비롯해 ‘지구별 인간’ ‘소멸세계’ 등을 쓴 일본의 소설가 무라타 사야카의 새 소설집 ‘신앙’의 표제작 ‘신앙’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소설집의 큰 주제는 ‘믿음’이다. “무언가를 깊이 믿는 사람, 혹은 믿고 있던 세계의 붕괴”라는 큰 줄기로 6편의 단편 소설과 2편의 에세이를 함께 엮었다.

무라타 사야카

‘신앙’ 속 인물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믿는’ 사람들이다. 사이카와는 정수기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 진심으로 믿었고 아사미 무리는 비싼 브랜드 접시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나가오카의 여동생은 고액의 창업 세미나가 진실로 자신의 창업을 성공시키리라 믿는다. 그리고 나가오카는 환상에 속아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지불하는 어리석은 그들을 ‘현실’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소설은 묻는다. 무엇이 진짜 ‘현실’일까. 나가오카의 여동생은 창업 세미나는 사기일 뿐이라는 언니의 외침을 들으며 이같이 말한다. “언니의 ‘현실’이라는 거, 거의 사이비 종교 수준이네.”

‘신앙’ 외 다른 5편의 단편은 보다 더 디스토피아적이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인공지능(AI) 등 인류에게 닥친 다양한 문제를 사야카의 방식으로 기괴하면서도 경쾌하게 풀어놓는다. ‘생존’은 기후위기로 인한 엄혹한 환경 속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는 세상을 그린다. 소득수준에 따라 생존율이 퍼센트로 나타나고 A, B, C, D로 등급이 나누어져, 이 등급에 모든 행동이 좌지우지되는 세상에서 구미는 스스로 D가 되어 알몸으로 산에서 생활하는 ‘야인’이 되고자 한다. 이와 함께 전자제품 코너에서 클론을 사들여 그들에게 각각 집안일과 회사일, 출산을 전가하려다 결국 클론의 도구가 되고 마는 주인공을 그린 ‘쓰지 않은 소설’, 얼굴과 목소리, 거리 풍경, 음식 등 모든 것이 통일된 도시에 관한 단편 ‘컬처쇼크’ 등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탱해온 인간의 존엄, 믿음, 신념을 차례차례 무너뜨린다.

저자는 일본에서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소 기괴하고 파격적인 내용의 책을 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야카 또한 어딘가 별나고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어서다. 단편소설들 사이에 자리한 에세이 ‘기분 좋음이라는 죄’에서 저자는 이에 대한 소회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이 단순한 캐치프레이즈로 멋대로 퍼지며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병에 넣어져 알기 쉬운 라벨이 붙었다면서. 무엇보다 그것이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이다. 한 방송의 프로듀서가 “무라타 씨, 오늘은 좀 평범해 보이는데, 촬영 시작하면 제대로 크레이지한 느낌으로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는 말을 듣고, 역시 이건 “안전한 장소에서 별종을 캐릭터화한 다음 안심하려는 형태의, 수용을 가장한 라벨링이자 배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깨달음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성’이라든가 ‘개성’이라는 말이 지닌 위선적인 면모를 생각하게 한다. ‘다양성’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나는 ‘기분 좋음’을 느끼진 않았는지, ‘기분 좋음’이 ‘죄’는 아닐지 말이다.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믿음들을 산산이 조각내는 책이다. 180쪽, 1만50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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