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한반도 전쟁설’ 확산…윤 정부만 모르는 ‘억제력 신화’
연초 증폭된 한반도 전쟁 위기설의 불씨는 미국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가 지폈다. 이들은 지난 11일 미국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공동기고한 ‘김정은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나'란 글에서 “김정은은 전쟁을 하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면서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한국전쟁 직전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후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두고 한국과 미국에서 정부 당국자, 전문가들의 논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본 사람은 소수였다. 1차 북핵위기를 마무리한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끈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가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최소한 염두에는 둬야 한다”고 주장한 정도였다.
대부분 전문가들과 한·미 정부 당국자들은 전쟁 발발 가능성을 낮게 봤다. “남북 간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지만 우발적인 무력 충돌 가능성은 있다”가 다수 의견이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 16일 한국방송(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준비한다면 러시아에 포탄 수십 만발을 수출하겠느냐”고 말했다.
한·미연합사는 북한의 적대 행위·기습 공격을 예측하고 대비하려고 ‘징후 목록’을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이 목록은 미군이 과거 전쟁 사례를 연구하여 매트릭스 형태로 작성한 범 세계 징후 목록 중 한반도와 관련 있는 징후 목록을 간추린 것이다. 예를 들어 △기계화 부대·기갑 부대의 전선 지역 이동 △항공기의 비행훈련 증가 △군 통신 활동 증가 △군수품 비축 증가 등을 전쟁 준비 활동으로 보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징후 목록이다. 특히 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항목들을 비상 징후로 분류해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한·미 정보당국은 24시간 북한 지역을 감시하다 징후와 관련된 특이한 정보가 입수되면 관련된 징후를 더욱 집중적으로 감시한다. 군 당국이 “징후가 격상되었다”고 밝힐 때는 북한에서 전쟁과 관련된 몇 개의 활동이 식별되고 있어, 이를 집중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원식 장관이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과장이라고 단언한 배경에는 ‘징후 목록에 특이 사항이 없다’는 판단이 깔렸다. 구체적으로 군대가 전쟁을 준비하려면 포탄 등 군수품 비축을 크게 늘려야 하는데 북한은 도리어 러시아에 포탄을 수출하고 있다. 북한의 험한 말과 달리 실제로 전쟁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전쟁 위기설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4일(현지시각) ‘증가하는 북한 위협, 무시는 통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미국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최근 도발이 그저 좀 더 큰 허장성세에 그치길 희망할 수 있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그 위협을 더 심각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썼다.
칼린·헤커가 불 지핀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꺼지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이 미국에서 손꼽히는 북한·북핵 전문가란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린과 헤커의 주장이니 뭔가 있을 테고 무시하기 힘들다”는 분위기가 한국과 미국의 전문가, 정부 당국자 사이에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지난 17일치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1980년대부터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 문제를 다뤄오면서 숱한 ‘거짓 경고’를 접했지만, 각별하게 믿을 만한 전문가의 경고를 외면할 수 없다”고 썼다.
칼린은 1971년 미 중앙정보국(CIA)에 들어가 1989년까지 분석관으로 일했다. 그는 1974년부터 북한 업무를 맡아 약 50년간 북한을 지켜봤다. 칼린은 1989년 미 국무부로 옮겨 2002년까지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 책임자를 지냈고, 대북특별대사의 수석 고문으로 일했다. 2006년까지 북한 신포에 경수로를 지어주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수석 정책자문관으로 일했다. 1996년 2월 이후 북한을 30번 방문했고 지난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 평양 방문 때도 장관을 수행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미국과 북한의 대화·협상에 관여했다. 조태용 국가정보원장은 외교부 1차관 당시 “(칼린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북한 노동신문을 읽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헤커는 플루토늄 과학, 핵무기 정책, 핵 안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핵물리학자다. 그는 미국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 일했고 연구소장을 지냈다. 1943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미국 에너지부 소속인 국립연구기관이다. 1943년 설립 당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연구소 책임자로 부임했으며 오게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등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집결해 인류 최초로 핵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북한이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총 일곱차례에 걸쳐 헤커를 초청해 북한 영변 핵시설 내에 있는 우라늄 농축 설비를 공개한 것은, 헤커의 경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부터 남북의 험악한 말과 군사적 과잉 대응도 한반도 전쟁 위기를 증폭시키는 구조적 배경이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지난달 연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체회의에서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라고 규정하며 “통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유사시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도 강조했다. 연말부터 이어지는 북한의 호전적 언행들은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타오르게 하는 땔감 구실을 했다.
새해 들어 남북 간 긴장이 높아지자 미국 백악관, 국무부는 대북 압박을 지속하면서도 북한을 향해 “외교로 복귀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와 달리 윤석열 대통령, 통일부, 국방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맞대응과 단호한 대처를 강조할 뿐 대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호전적 언행을 4월 총선을 앞두고 남남 갈등을 유발하려는 심리전으로 해석하고, 국민과 정부는 하나가 되어 북한 정권의 기만전술과 선전, 선동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린과 헤커의 기고문은 한국과 미국이 억제력의 신화에 빠져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기고문은 “한-미는 철통같은 억제력을 강조하는 등 김정은 위원장이 현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시도하면서 북한 정권의 완전한 파괴를 공언하지만, 그런 믿음은 치명적일 수 있다”며 전쟁이 발발하면 “한-미가 승리하더라도 결과는 무의미할 것”이며 “헐벗고 무한한 잔해는 눈이 볼 수 있는 한 끝까지 뻗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에서 이기기보다는 전쟁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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