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게 했다가 오히려 회사 망치는 ‘현장경영’[박찬희의 경영전략]

2024. 1. 2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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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략]



사업현장을 직접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경영자. 대중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그래서 명절 연휴가 되면 어김없이 해외 사업장을 찾는 기업 총수의 활약상이 언론에 등장하고, 여행길에 읽는 책도 화제가 된다. 정치면에서는 ‘광폭 행보’라는 말을 붙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는 그림을 담는다. 재래시장과 떡볶이·어묵이 ‘서민의 벗’이라는 상징으로 더해진다.

화려한 궁궐에서 궁인과 귀족들에 둘러싸인 세상 물정 모르는 ‘벌거숭이 임금님’과 달리 서민과 애환을 나누며 최일선에서 전쟁을 이끄는 통치자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으로 부각된다. 현장경영에 대한 기대는 이런 서사를 반영한다.

경영전략 분야에서도 이런 현장경영을 관료화된 기업체제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중요한 테마로 부각시킨 바 있다. 경영자가 자연스럽게 구성원을 만나고 현장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적절한 긴장과 동기부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현장경영도 잘못하면 오히려 독(毒)이 돼 회사를 엉망으로 만든다.

 

 어설픈 결단의 후폭풍…‘짜맞춘 이벤트’도

잔뜩 꼬인 현안을 현장에서 쾌도난마(快刀亂麻)로 풀어낸다면 이처럼 좋은 일이 없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끼어들어 마구 휘두르면 일이 더 엉망이 된다.

대기업 집단의 통수권을 물려받은 지 10년 된 K 회장은 자신의 체제를 새롭게 만들고자 나섰다. 해외 사업현장에 마련한 관계사 임원회의에서는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내고 그 자리에서 전략 방향을 제시한다. 부실한 성과를 보인 관계자들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작업복에 안전모까지 쓰고 현장을 누비는 K 회장에게 ‘광개토대왕의 진두지휘’라고 칭송하는 기사까지 등장한다.

그런데 K 회장의 ‘현장 결단’이 통할 만큼 간단한 사업은 없다. 날카로운 질문에 답이 궁한 것은 사람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마땅한 답이 없기 때문이고, 현지 정부나 이해관계자와 엉킨 문제들은 지구전으로 시간을 끌며 상황 변화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 내부의 입장 차이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위험을 줄이는 견제와 균형일 수도 있다.

K 회장이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 일은 더 꼬여버린다. 더구나 이 결단을 건수 삼아 권세를 펴려는 측근들은 ‘어명 전달’과 ‘결과 점검’을 내세워 암행어사 마패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 편승해서 실리를 얻으려는 회사 안팎의 엉큼한 사람들도 가세한다.

수십 년 동안 서로 스크럼 짜고 눈치 보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K 회장 머리 꼭대기에 있다. 어설픈 현장경영으로 일이 잔뜩 꼬이다 보면 이제 잘 짜맞춘 이벤트성 어전회의가 시작된다.

그럴듯한 영상자료에 질문, 농담까지 짜맞춘 회의에서 K 회장은 이 이벤트를 기획한 사람들의 꼭두각시가 된다. 한 말씀 하는 ‘높은 분들’은 보고받아 외운 내용이니 제대로 토론이 될 리가 없다.

10년 전 반도체 개발로 출세한 분이 패션회사 사장이고 비서실에서 20년간 회계장부 만지던 분이 기획실장 맡고 있는데 무슨 토론이 되겠는가. 실제 패션 일하는 사람들은 어전회의에 끼지도 못한다. 어쩌다 말석에 구겨 앉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목이 날아갈까 걱정일 뿐이다.

 

 경청과 공감의 리더십

아무리 뛰어난 경영자도 세상 모든 일에 정통할 수는 없다. 구멍가게로 시작해서 직접 키운 회사라도 세상이 달라지고 회사 속사정도 달라진다. 그래서 더 잘하는 인재들이 필요하고, 이들과 함께 일하려면 경영자도 죽기 살기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복잡하고 험한 현실에서 한도 끝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지만, 그 노력을 멈춘 순간 주주의 돈으로 폼 잡고 누리는 기생충이 된다.

천사들이 모인 회사라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고민이다. 하물며 개인의 출세와 이익, 하다못해 생존이 다급하니 무턱대고 믿고 맡길 수가 없다. 그래서 역할을 나눠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고 실행과 감독의 균형을 갖추는 체제가 필요하다. 이런 틀에서 다각도로 검토된 정보가 없이 마구 쾌도난마의 결단을 휘두르면 궁예 말기의 ‘미륵 관심법’이 되고 만다.

경영자는 충분히 잘 아는 사안을 세밀하게 검토해서 확신이 있을 때 현장에 개입해야 한다. 경영학 원론에도 나오는 ‘선별적 개입(selective intervention)’의 원칙이다. 잘 짜인 체제에서 보고된 공식정보와 외부의 색다른 시선과 새로운 정보를 교차검증할 때 더 효과적이다. 준비도 부실한데 시도 때도 없이 잘 모르는 소리를 하면 ‘바보 잔소리꾼’이 된다.

현장경영의 진정한 의미는 세심한 관찰과 확인, 그리고 진솔한 소통에 있다. 현장에서의 회의와 면담은 직접 일하는 사람들의 솔직한 얘기를 듣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숨은 인재를 찾을 수 있고, 감춰진 사연을 알게 된다. 어렵게 진실을 얘기한 사람이 보복당하거나 ‘기득권 체제’에 위험인물로 찍혀 숙청되지 않도록 챙기는 노력도 필요하다.

‘회장님이 여기까지 와서 함께 하신다’고 느끼면 미담이 된다. ‘내 얘기를 들어준다’고 믿으면 동기부여가 된다. 이른바 경청과 공감의 리더십이다. 하지만 ‘높은 분 폼 잡고 덜 높은 분들 아부하는 데 동원되어 힘만 든다’고 생각되면 짜증만 더할 뿐이다.

 

 온라인 시대, 전 세계가 현장

인터넷과 모바일로 전 세계의 뉴스와 콘텐츠를 24시간 접하는 시대에 경영자는 구중궁궐의 신비한 존재일 수가 없다. 층층시하에서 전해 듣는 뻔한 훈시 말씀에 공감하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보채널을 통해 회사와 경영자를 만난다. 여기에 타인의 의견도 더해지면서 나름의 스토리를 구성한다. 현장경영의 공간이 24시간 전 세계로 확장된 셈이다.

이미 대부분의 구성원은 이렇게 자신의 스타를 만나고 ‘팬덤’ 속에 산다. 미국 대통령의 일상에서 세계 정치·경제의 방향을 읽는다.

이런 세상에선 이역만리 건설현장에 가도 의례적인 악수와 훈시 말씀에 그친다면 ‘꼰대질’이 될 뿐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 하나라도 성의 있게 공감을 얻으면 현장경영이 된다.

수줍은 댓글에 솔직한 댓글이 더해지면 더 좋은 일이다. 유치한 취미사진 몸 자랑이 아니라 내용 있는 소통의 장을 만들라는 얘기다. 공개적 소통이 부담스럽다면 글 올린 사람의 뜻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보호해줄 채널을 만들면 된다.

현장 직접 방문이든 SNS 메시지든 핵심은 경청과 공감에 있다. 생산현장에 가서 작업복 입고 식판 들고 줄 서도 귀담아듣고 공감하지 못하면 뻔한 이벤트에 불과하다. 중동 현장에는 마실 물도 없는데 휴양지에서 샴페인 사진을 올리면 공분을 살 뿐이다.

거짓과 왜곡이 난무하는 영악한 사내정치에 포획되지 않고자 비선(秘線)을 둔다면, 현장경영은 이런 비선의 횡포까지 걸러내는 기회가 된다. 사업장 방문해서 직원들 만나는 것만 현장경영이 아니다. 소비자, 투자자, 전문가 집단 등 다른 접촉면들도 중요한 현장이다. 정치가 정책을 만들고 이것이 사업환경이 되는 현실에서 일반 대중과의 접촉면도 또 다른 현장이다.

미디어를 통한 소통(보도자료 같은)은 일방적 정보제공이 아니라 이들 접촉면에 대한 경청과 공감이 돼야 의미가 있다. 온라인과 모바일로 접하는 경영자의 메시지는 또 다른 경청과 공감의 창구가 된다.

단순한 홍보(PR)나 투자자관리(IR)가 아니라 달라진 세상에서 새로 생긴 현장경영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사업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는 경영자 못지않게 하루치 구경거리만 잔뜩 만드는 경영자도 회사에 독이 된다는 말씀.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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