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기자의 초강수] 만만찮은 충청도 배태망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풍경
들머리인 크라운제과 앞에 서자 특이한 이정표가 우릴 반겼다. '배태망설 19.9km' 별도의 종주코스를 알려주는 이정표라니! 나는 생각했다. '유명한 코스니 이런 이정표가 있겠구나' 인기 있는 종주길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배태망설은 종주산행꾼들에게 유명한 코스다. 아산·천안의 400~600m의 나지막한 산을 오르내리는 코스로, 지리산 종주 같은 장거리 산행을 앞두고 훈련 겸 걷는 이들도 많다. '원점회귀 가능, 대중교통 접근성, 20km의 적당한 거리'라는 특징은 배태망설의 주요 인기요인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곳을 '충남알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에는 배태망설을 종주산행 입문으로 추천하는 글이 꽤 많다. 나는 한양대 산악부 김도희양과 성균관대 산악부 출신인 박기완씨와 함께 배태망설 종주를 떠났다.
지긋지긋한 첫날
크라운제과~망경산 11km
겨울산은 눈 대신 가을철 떨어진 마른 낙엽들로 가득했다. 아스팔트를 벗어나 부스럭거리는 낙엽을 밟기 시작하기 비로소 산에 왔음이 실감났다. 초반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자 안락한 길이 이어졌다. 둘레길 같은 편한 길을 1시간 30분쯤 걸으니 배방산 정상(362m)이 나왔다. 여기까진 다들 쌩쌩한 표정이었다.
정상 조망대에 서니 오늘 걸어야 할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길었고, 오르내림도 상당했다. 망경산까지 꽤 많이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둑 열린 강물이 쏟아지듯 태화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화산 등산로는 주능선을 따라 나있었다. 샛길 없는 외길이었다. 길 대부분은 낙엽과 잡목이 가득했다. 평범한 야산이었다. 중간중간 바윗길이 변주처럼 나타났지만 길진 않았다. 낙엽 속에는 모래 속 진주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규석과 비슷하게 생긴 작고 하얀 돌덩이였다.
느닷없이 조그만 억새군락이 나타나기도 했다. 소소한 자연의 장식품들은 자칫하면 지루할 길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낙엽이 꼭 레드카펫 같군' 이런 생각이 들 때쯤 태화산(461m)에 도착했다. 시간은 3시에 가까웠다.
넙티고개를 향해 서둘러 내려갔다. 산을 내려오자 조그만 마을이 나왔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지붕 위로 따스한 햇볕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넙티고개를 지나 다시 등산로로 들어섰다. 고개 근처에는 음식과 차를 파는 가게가 몇 있었다. 고개치고 건물이 들어선 땅이 꽤 넓었다. 고갯길 폭이 길게 늘어진 모양이라 '넙티고개'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수긍이 됐다.
고개를 드니 커다란 망경산(600.9m)이 보였다. 망경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이정표는 정상까지 1.4km만 가면 된다고 했다. 고도표를 보니 400m를 올려야 했다. '굉장한 오르막이 되겠는데?'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끔찍한 경사길이 나타났다. "후…후…" 모두 말 한마디 없이 오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40분을 걸었다. 헬기장 뒤로 정상석이 보였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옷을 챙겨 입고 곧바로 텐트를 쳤다. 빨갛게 물든 하늘을 보며 비화식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각자의 텐트 안에서 12시간 수면 훈련을 시작했다.
솔치고개부터 이어진 비슷비슷한 지겨운 길이 끝나자, 태화산 정상이 나왔다.
넙티고개까지 조그만 마을을 가로질러 갔다. 해외의 낯선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커다란 벽 같은 망경산의 등장! 망경산 정상은 사진의 봉우리 너머에 있었다.
이정표 주의! 여기서부터 지독한 경사가 시작된다.
망경산 정상에 도착하자 해가 지고 있었다. 헐벗은 나뭇가지 위로 아산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오후 7시가 되자 사방이 캄캄해졌다. 각자의 텐트로 들어가 12시간 동안 잠만 잤다.
한결 수월한 이튿날
망경산~초원아파트 9km
텐트 밖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 7시가 되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텐트 밖으로 기어나왔다. 물을 마시려고 보니 살얼음이 껴있었다. 아침 대용으로 챙겨온 호떡은 뻑뻑하다 못해 딱딱해져 있었다. 추운 밤이었다.
짐을 싸고 출발했다. 능선을 중심으로 한쪽 사면은 따뜻한 주황빛, 다른 사면은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봉우리를 하나 넘자 망경산삼거리가 나왔다. 우린 예정대로 설화산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광덕산까지 왕복 6km 산길을 걸어야 했다.
서서히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임도를 만나자마자 정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정비했다. 정자 옆에는 새로 심어진 나무들이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에 비해 아직 아기에 불과한 크기였다. 배태망설 종주길에는 새로 만들어진 조림지가 몇몇 있었다.
설화산으로 가는 길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앞서가던 기완씨는 낙엽길을 스키 타듯 쓱쓱 내려갔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눈 뭉치 밟히듯 들리는 낙엽소리 덕에 산행의 재미가 더해졌다. 지루해 보이는 길에도 재미라면 재미인 것이 있었다. 특히 소나무 군락에 서서히 스며드는 햇빛은 이상한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들게 했다.
"저건 뭐죠?"
도희양의 질문과 동시에 특이한 간판이 나타났다. 배태망설 종주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연보호' 간판이었다. 초록색 배경에 레트로한 글씨체로 '자연보호'라 적혀 있는 간판은 흡사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절반도 안 남았어요. 좀만 더 힘내요!"라는 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1.5km의 온순한 내리막을 스키 타듯 내려왔다. 가팔라 보이는 오르막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나뭇가지 너머로 암벽지대 위 펄럭이는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설화산 정상(447.5m)이란 직감이 왔다. 끝이 보이자 다들 힘이 난 듯 보였다. 다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파죽지세로 정상까지 순식간에 돌파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모두 보여요!"
기완씨의 말대로 정상에 서자 폭죽 터지듯 조망이 터졌다. 불꽃놀이의 절정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겨울 철새들은 저수지 위로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멋진 풍경이 능선을 따라 쭉 이어졌다.
선선한 산바람이 두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겨울날 오래도록 닫아두었던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잠시 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트레일러닝하듯 초원아파트까지 쏜살같이 내려갔다. 하산길 옆으로는 산불에 검게 타버린 고사목이 여럿 있었다.
설화산 정상에 걸린 태극기. 우리는 멋진 풍경과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1박2일간 우리가 걸어왔던 능선이 보였다. 생각보다 오르내림이 많았다.
하산길은 트레일러닝하듯 뛰어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머리인 초원아파트가 나왔다.
스타일 탐구
1박 2일 백패커들은 어떻게 입었을까?
상의
Houdini Power Houdi
하의
Montane Terra Alpine Pants
신발
Nnormal Kjerag
모자
Arc'teryx Word Head Toque
배낭
Hyperlite Mountain Gear Southwest 55 Pack
스틱
Leki Cross Trail FX Superlite
고글
District Vision Koharu Eclipse
장갑
Mammut Fleece Pro Glove
박기완씨는 비니를 2개 챙겼다. 하나는 산행용, 다른 하나는 취침용이었다. 그는 쉴 때마다 가방에서 Houdini 외투를 꺼내 입었는데, 소매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끼워 손등과 손바닥을 가릴 수 있었다. 이 디테일이 보온성을 높여 줘 좋다고 했다. 트레일러닝을 즐기는 그는 HMG 배낭, Leki 카본 스틱, Nnormal의 트레일러닝화 등 경량에 중점을 둔 장비를 애용하는 편이다.
난이도
★★★
"전반적인 난이도는 별 두 개, 아찔한 망경산 경사에 별 하나 추가!"
외투
Patagonia Torrentshell 3L
상의
Nike Dry-fIt GX Crew
하의
Deuter
신발
Millet
모자
Rab Logo Band Beanie
배낭
Deuter ACTlite 40+ 10
스틱
로이어 알루미늄 T자형 등산 스틱
장갑
Black Diamond Wind Hood GridTech
김도희양은 중고거래 마니아다. 대부분의 등산용품을 중고거래로 구매한다. 그녀는 이번 산행에 중고 사이트에서 저렴하게 구한 외투, 바지, 배낭, 장갑을 들고 왔다. 2년째 사용하고 있다는 배낭은 아직 튼튼해 보였다. 그녀가 입고 온 나이키 상의에 눈길이 갔다. 맨투맨처럼 생겼는데, Dry-fit 소재라 땀 배출이 잘된다고 했다. 후드를 활용해 손모아장갑으로 만들 수 있는 장갑이 꽤 유용해 보였다.
난이도
★★★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방울토마토가 간절히 생각나는 길."
어쩌다 마주친 장비!
블랙다이아몬드 윈드 후드 그리드텍 글러브
Black Diamond Wind Hood Gridtech Gloves
내한 온도 최저 –6℃, 두 가지 형태로 활용 가능
도희양은 특이한 장갑을 끼고 산행했다. 오른손에는 다섯 손가락이 있는 평범한 장갑이, 왼손엔 미트 형태로 된 손모아장갑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장갑을 두 종류 들고 다니시나 봐요?" 그녀가 답했다. "아니오. 이거 같은 장갑이에요!"
트랜스포머 같은 장갑이다. 상황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 있다. 손목 부분에는 말아서 보관된 방풍 후드가 있는데, 날씨가 추우면 후드를 꺼내 손모아장갑으로 만들면 된다. 그녀는 "극동계 외에는 이 장갑 하나면 걱정 끝!"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휴대폰 터치도 가능한 활용성 좋은 겨울 산행 아이템!
산행길잡이(지역번호 041)
배태망설은 걷기에 집중하는 종주다. 20km나 되는 장거리 코스지만, 조망이 트이는 곳은 거의 없다. 배방산과 설화산 정상 부근에 가서야 주변 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터가 나온다. 이외의 구간은 대부분 수풀과 잡목이 시야를 가린다. 전형적인 육산이다.
들머리인 크라운제과부터 배태망설 코스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표지판은 길을 걷는 내내 볼 수 있다. 능선을 따라 쭉 걷다가 가끔 만나는 갈림길에서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방향을 잡으면 된다.
배태망설 종주코스를 변형해 산을 타는 이들도 있다. 배태망설에서 광덕산을 추가하는 일명 '배태망광설'이다. 망경산삼거리~광덕산 구간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넙티고개에서 망경산으로 올라가는 급경사가 거의 유일한 난코스다. 이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편안하고 호젓한 길이다. 샘터나 계곡이 없어 물을 보급할 수 없다. 따라서 물을 넉넉히 챙겨가야 한다. 넙티고개 근처에는 황토마루(548-1009)와 명막골(549-5420)같은 식당이 있다. 식사 후 물을 보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교통
대중교통과 자가용 모두 이용이 편하다. 대중교통으로 이동 시 1호선 배방역과 온양온천역을 이용하면 된다. 그중 배방환승정류장을 출발해 배방역을 거쳐 크라운제과로 가는 85번 버스가 하루 4번(08:20, 12:50, 17:30, 18:40, 기점 기준) 운행한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초원아파트 아래 좌부동공영주차장에 주차 후, 택시 혹은 도보로 들머리로 이동하면 된다. 들머리까지 도보 15분, 택시 5분 소요된다. 택시비 약 5,000원. 초원아파트 택시승강장 이용.
맛집(지역번호 041)
아산에는 오랜 지역 전통이 담긴 향토 음식이 여럿 있다. 그중 붕어, 피라미, 쏘가리 같은 민물고기로 죽을 쓴 어죽이 유명하다. 크라운제과 근처에 다양한 민물매운탕을 판매하는 금강민물매운탕(546-6264)이 있다. 배방역 근처의 모산수제비(548-5252)에서 뜨끈한 국물과 수제비, 칼국수로 지친 몸을 데우는 것도 좋은 선택지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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