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곰탕만 떠올려서…본격 ‘나주’ 맛 기행
초겨울이면 몇년째 해 오는 ‘리추얼’이 있다. 날이 쌀쌀해지면 특히 맛이 좋아지는 홍어를 식당에서 혼자 먹는 것이다. 삼겹살집에서 ‘혼밥’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 혼밥시대건만 자부해본다. 홍어회 앞에서의 혼밥은 꽤 높은 난도일 것이라고.
이번 겨울 초입, 창덕궁 근처 한 홍어집에선 본의 아니게 혼밥에 실패했다.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부부는 곡진한 사연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친근하게 말을 건네오셨다. 몇마디 섞고 대충 선을 그을까 했으나 불가능했다. 틈날 때마다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라는, 인천이 고향이라는 이분들이 알려주는 상호들은 거의 처음 들어본 곳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떡밥’이었다. 받아 적느라 홍어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을 못 차리던 ‘혼밥러’에게 그분들은 물었다. “홍어를 그렇게 좋아하면 나주 영산포는 가보셨나요?” 나주곰탕을 먹고 영산강 황포돛배 구경을 해본 것 말고는 나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었다. “홍어 하면 목포 아닌가요?” 하고 되묻자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삭힌 홍어의 고향이 나주예요. 전라도 양반가 음식 뿌리이기도 하고. 목포나 여수에 밀려서 그렇지, 전라도 하면 나주죠. ‘전라’가 전주와 나주에서 딴 거잖아요. 천년고도인데도 경주처럼 주목을 못 받고 있어요.”
폭설이 쏟아진 지난 9일, 나주로 내려간 건 나만 몰랐던 나주에 대한 호기심, 아니 엄밀히 말해 올겨울이 가기 전 영산포에서 반드시 홍어를 먹어봐야 한다는 집착 때문이었다.
홍어 1번지 영산포
영산대교를 건넌 뒤 영산강변을 따라 100m 남짓 내려가면 싸하고 퀴퀴한 홍어 냄새가 코끝에 와닿는다. 영산포 홍어거리의 시작이다. 몰려 있는 홍어 전문 도매업체만 40여곳, 푸짐한 홍어 한 상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10여곳에 이른다. 강변엔 ‘600년 전통 영산포 홍어거리’라는 큼직한 팻말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말부터 이 지역이 홍어거리였다는 이야기다. 당시 왜구의 침입이 심해 영산현 흑산도 일대 사람들이 지금의 영산포 지역으로 피란을 오게 됐다. 뱃길로 보름이 걸려 싣고 온 생선이 다 부패했지만 푹 삭은 홍어만은 독특한 풍미로 입맛을 사로잡았다. 영산포라는 이름, 삭힌 홍어를 먹게 된 유래다. 조선 후기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나주와 가까운 고을 사람들이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고 썼다. 오랫동안 수산물 유통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영산포 일대에 홍어를 삭혀 파는 도매점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하굿둑이 막혀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다.
집집마다 나름의 홍어 삭히는 비법이 있었고 대소사에 빠지지 않는 음식. 큰일을 치를 때면 반드시 상에 올라야 하는 홍어는 전라도 음식문화의 중심이고 정수다. 2대째를 이어오는 영산포홍어 김영수 대표는 황토를 이용한 숙성실에서 홍어를 숙성시킨다. 숙성실 문을 여니 응축된 암모니아 냄새가 눈까지 찔러온다. 성인 남성 허리까지 올라오는 10여개의 큼직한 항아리 안에는 홍어가 담겨 있다. 김 대표는 항아리 위의 두툼한 짚을 들추고 한 마리를 꺼냈다. 날개를 펼친 모양이 상반신을 가릴 만큼 크다. 숙성실은 연중 2~3도를 유지하는데, 홍어의 크기나 계절에 따라 숙성기간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냉장 시설이 발달하면서 연중 홍어를 먹지만 예전엔 찬 바람 불 때 주로 홍어를 먹었어요. 겨울에 홍어 살이 짠득짠득하니 제일 찰지거든.”
홍어의 맛있는 부위를 두고 코, 날개, 꼬리, 몸통 등으로 순서를 따지기도 한다. 날개 부분(국산 1㎏ 기준 18만원)은 모둠(12만원)보다 더 비싸다. 같은 1㎏을 주문하더라도 흑산도산 날개 부위는 26만원, 아르헨티나산 모둠으로 선택하면 6만원이니 가격 차이가 큰 편이다. 예부터 홍어는 암컷이 수컷보다 부드럽고 맛있다고 여겨졌다. 어부들이 수컷 홍어를 잡으면 바로 성기를 잘라버렸다. ‘만만한 게 홍어 좆’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수컷은 뻐시죠(뻣뻣하죠). 썰어보면 암컷이 차지고 부드러워요. 대부분은 구분 없이 먹지만 굳이 암컷으로 주문하는 분들도 간혹 계시지요.”
홍어삼합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함께 싸 먹는 것이다. 영산포에서는 김도 같이 주므로 취향껏 싸 먹으면 된다. 홍어정식을 시키면 함께 나오는 홍어 애, 즉 홍어 간도 별미다. 크림처럼 부드럽게 퍼지는 것이 푸아그라나 아귀 간 이상이다. 겨울철에는 보리순, 시래기를 된장에 푼 육수에 홍어 애를 넣어 끓인 보리애국도 먹어줘야 한다. 진하고 구수한 국물이 찬 바람을 저만큼 떨쳐버릴 만큼 든든하다. 홍어는 열을 가하면 쏘는 맛이 강렬해진다. 정수리를 뚫고 막힌 것이 터져나가는 기분을 맛보고 싶다면 보리애국에 삭힌 홍어살을 넣고 끓인 홍어탕을 주문하면 된다. <동의보감> <자산어보> 등에서는 홍어를 두고 “해독작용이 탁월하다”고 했다.
영산포에는 홍어를 활용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도 있다. 영산홍어는 ‘심해로’라는 브랜드로 홍어 가공품과 건강보조식품, 화장품 등을 생산·판매한다.
나주곰탕
나주음식 하면 자동으로 떠올리는 것이 곰탕이다. 진하고 맑은 국물에 부드러운 살점이 푸짐한 곰탕 맛집들은 나주 원도심에 몰려 있다. 금성관 앞에 자리 잡은 하얀집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나주곰탕의 대명사다. 늘 방문객들이 북적이는 이곳 입구에 들어서면 오픈 주방에서 여러 직원들이 뚝배기를 들고 토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토렴은 밥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길 반복하며 밥알에 국물이 배도록 하는 것이다. 밥알 하나하나의 맛을 더 살려내는 고유의 방식이다.
신선한 한우로 끓여낸 곰탕에 숟가락을 넣어 한술 뜬 뒤, 그 위에 김치를 얹고 먹는 한 입.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 맛이다. 커다란 솥 8개가 평일에는 최소 1000그릇, 주말에는 2000그릇 분량을 끓여낸다. 지난해 12월 김장에 사용한 배추는 62t 분량이다. 1910년 나주장터에서 국밥집으로 시작했던 것을 곰탕전문점 하얀집으로 단장한 것은 1969년이다. 4대 길형선 대표의 부친이 맑고 깨끗하게 살자는 의미를 이 상호에 담았다고 한다. 5대인 길덕진 부대표(28)는 매일 새벽 아버지 길 대표와 함께 식당에 나와 고기를 다듬고 시식을 겸해 곰탕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나이 드신 분들은 나주곰탕이나 나주 하얀집을 꽤 알고 계시지만 제 또래는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라 책임감이 느껴진다”면서 “아버지가 늘 강조하는 좋은 재료와 성실함, 꾸준한 공부가 제 세대에도 하얀집의 맛과 명성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얀집과 함께 노안집, 남평할매집도 오랜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곰탕집이다. 나주 사매기길 일대에는 이외에도 여러 곰탕집이 몰려 있다. 나주가 곰탕으로 유명해진 것은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 당시 일본은 나주에서 군수물자로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었다. 통조림 제조에 사용하고 남은 부위를 상인들이 가져가 끓여 만든 것이 곰탕이었다.
나주는 단무지 공장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주시 문화예술과장을 지낸 김종순 학예관은 “조선시대부터 나주는 엄청난 무 산지였는데 호리병처럼 생긴 영산 무를 심었던 뜰에 일본인들이 길쭉한 왜무를 심어 ‘다쿠앙’을 만들었다”면서 “해방 후 오랫동안 단무지 공장이 몰려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가와 명인
나주가 천년고도로 불리는 것은 고려 성종 때부터 지방 행정조직인 목(牧)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천년간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나주목의 객사 건물인 금성관은 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조정의 연회를 열었던 곳. 나주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다. 나주향교는 3대 향교로 불리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던 성균관을 복원할 때 본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을 이곳에서 찍었다.
행정 중심지이고 물산과 인재가 모이는 곳이다 보니 자연히 음식 문화, 특히 반가의 음식이 발달했다. 하지만 현재 전라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음식에 관한 주목도는 덜한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반가의 음식이다 보니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주 음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천수봉 명인이다. 전라남도 음식 명인이자 대한민국 한식 명장으로 나주 음식을 알려온 그는 “나주는 땅의 80%가 황토밭인 최고의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천혜의 식재료가 풍부한 맛을 내고 어느 집에 들어가도 음식이 맛있다”고 말했다. 그가 냉장고에서 꺼내준 나주반지는 수라상에도 올랐던 나주 양반가의 전통 김치다. 낙지와 대하, 소고기, 석이버섯채 등 호화 식재료를 넣은 이 김치는 맑고 슴슴하면서 시원했다. 영산강 하구에서 잡히는 웅어로 만든 회나 완자조림, 토하젓, 진석화젓, 삭힌 고추와 무말랭이를 비롯해 채소를 많이 넣어 만드는 집장도 나주의 역사와 함께한 음식들. 특히 나주육회는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그는 또 나주 특산물인 배로 만든 배깍두기, 통배김치, 배떡갈비, 배약과 등 다양한 배요리도 개발하고 있다.
전라도 밥상 그리고...
오랜 역사와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진 나주는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유명한 관광도시로 꼽히는 편은 아니다. 이 때문인지 소위 인플루언서 사이에 소문난 전국구 맛집은 적다. 대신 입맛 까다로운 남도에서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들을 찾아봤다. 주당들이 입 모아 꼽는 곳은 영산강변에 자리 잡은 영일복집이다. 친정어머니 때부터 대를 이은 60년 된 노포에서 내놓는 복탕은 지금껏 봤던 맑은 국물이 아니라 걸쭉하고 뽀얀 육수였다. 미나리를 듬뿍 넣어 끓어 오른 국물을 한 숟갈 떠넣자 냄비째 들고 마시고 싶어졌다. 찹쌀풀을 넣어 걸쭉한 맛을 낸다고 했다. 한창때를 피해 오후 2시가 넘어 갔는데도 복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산강변 구진포 일대는 예전부터 장어로 유명했다. 일대에 장어구이 전문점들이 몰려 있다.
나주 원도심에는 남도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꼬막, 간재미무침, 조기탕 등 남도식 백반상을 즐길 수 있는 수미식당, 병어조림이 맛있는 훈이네, 보리굴비 백반집 삐삐식당 등이 대표적이다. 나주초등학교 근처 진미옛날순대는 유명 정치인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암이지만 나주 사람들이 하나같이 추천하는 삼겹살집은 금동숯불구이 식육식당이다. 곁들여 먹는 새우젓의 맛이 탁월해 이 새우젓 때문에 찾는 사람들도 있다. 연방죽참숯불구이도 유명하다. 육회비빔밥을 내놓는 왕곡가든은 말 그대로 밥 반, 고기 반이라 눈까지 즐거운 맛집이다.
고즈넉한 한옥들이 모여 있는 금성관길에 자리 잡은 카페 정온담은 배를 넣어 끓인 배쌍화차를 비롯해 배를 활용한 차와 디저트를 내놓는다. 공공기관이 밀집한 혁신도시에 3개의 점포를 낸 로스터리 카페 헤일로는 ‘타향살이’하는 서울 사람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곳이다. 유명 사이포니스트(진공 여과 커피 사이폰 추출 전문가) 모아론씨가 운영하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주 |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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