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 과학자 한국보다 많은 칭화대… ‘퍼스트 무버’ 되고 싶다면 대학에 더 투자해야”
R&D 예산에서 대학 비중 9.1% 그쳐…미국·영국 수준으로 늘려야
교수에 잡일 떠넘기는 개도국형 연구 모델 바꿔야
연구비 분배에 연구몰입환경도 함께 평가해야
이용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은 공학계와 교육계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인정받는 공학 교육의 대가로 꼽힌다. 그는 미국 버팔로 뉴욕주립대를 거쳐 1989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공대생들을 가르친 공학자이자 교육자다. KAIST에선 신기술창업지원단 단장, 공대 학장, 정보과학기술대학 학장, 교학부총장을 지내며 학술 영역과 산학 협력, 교육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2018년에는 KAIST 창의강의대상을 받았고, 이듬해인 2019년 UNIST 총장으로 부임했다.
UNIST에서는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던 학사과정 교육을 대대적으로 혁신했다. 이 총장은 연구중심대학의 학사과정을 ‘K팝 아티스트’의 연습생 생활에 종종 비유한다. 연습생 생활을 제대로 거쳐야 K팝 아티스트로 성공하듯이 학사과정에서 촘촘한 교육을 받아야 대학원 이후에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턴십과 창업동아리 활동을 강화해 실전형 공학교육의 비전도 제시했다.
이 총장이 취임한 이후 UNIST의 평판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4대 과학기술원과 포스텍의 순위를 말할 때 과학기술계 대부분이 UNIST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 다음으로 놓는다.
2019년 11월 취임한 이 총장의 공식 임기는 작년 11월로 끝났다. 지금은 차기 총장을 뽑은 절차가 진행 중이다. 연임 의지를 밝힌 이 총장을 지난 23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의 UNIST 본관에서 만났다. 지난 4년간의 성과와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4년 더’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4년의 임기를 마쳤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가 있다면.
“처음 유니스트에 왔을 때 재정적으로 거의 파산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소관 부처가 교육부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바뀌면서 인건비 지원이 절반으로 깎였다. 교원 인건비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비중이 2015년을 기점으로 78%에서 43%로 줄었다. 인건비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은 49% 수준이 됐다. 여전히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고비는 넘겼다.
유니스트의 약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유니스트는 에너지와 화학 분야가 강한데 비해 IT 분야는 약했다. 그래서 4년 동안 인공지능, 탄소중립, 반도체, 바이오메디컬을 강화하기 위해 매년 하나씩 대학원을 신설했다. IT 분야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교수를 충원하고, 삼성반도체 계약학과와 반도체특성화대학원을 만들면서 반도체 불모지였던 울산에 반도체를 특화산업으로 키울 기반을 닦았다. 울산지역의 정밀화학 기업이 반도체소재부품 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고 있다.”
-연임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지난 4년 동안 대학원을 새로 런칭한 분야를 더 성장시켜야 한다. AI는 젊은 교수들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아직은 리더십이 약하다. 반도체는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다. KAIST에 있는 동안 AI와 반도체 분야를 육성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사람을 뽑고, 투자를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탄소중립 분야에서도 연구 성과를 실증할 수 있는 실증파크를 기획 중인데, 내 손으로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의과학 분야도 강화해야 한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을 유니스트에 통합하는 방안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지방자치단체와 논의 중이다. 다른 사람들도 잘 할 수 있겠지만, 공학교육과 행정에서는 누구보다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맡겨주면 열심히 하겠다.”
-작년 하반기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연구비 집행의 비효율이 화두였다.
“우리나라 전체 연구비가 100조원 정도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는 연구비가 너무 적다. 문제가 있다면 이 부분이 문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비가 한국이 세계에서 1, 2위를 다툰다고 하는데, 대학에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2020년 기준으로 국가연구개발 총예산이 102조1352억원이었는데 이 중 대학에는 9조2943억원이 배정됐다. 비중으로 치면 9.1%다.
미국은 11.3%, 독일은 18.7%, 영국은 23.5%인 것과 비교하면 작다. 영국은 총예산이 56조원으로 우리의 절반 정도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돈은 13조2179억원으로 오히려 우리보다 많다. 중국은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7.7%로 우리보다 낮지만 총예산이 404조원인 덕분에 금액으로는 31조원이 넘는다. 대학에 오는 연구비가 늘어야 대학이 퍼스트 무버형 연구, 선진국형 연구를 할 수 있다.”
이 총장은 대학에 대한 R&D 투자 부족을 이야기하며 중국 칭화대 사례를 꺼냈다. 이 총장이 KAIST에 있던 2003년 칭화대는 KAIST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여러 고위 인사가 한국을 직접 방문했다고 한다. 한국의 연구중심대학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칭화대는 2022년 HCR 연구자 73명을 보유해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HCR 연구자를 보유한 기관이 됐다. 글로벌 학술정보업체인 클래리베이트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HCR‧Highly Cited Researcher)’는 좋은 대학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대표적인 가늠자다. 클래리베이트는 매년 논문 피인용 횟수 상위 1% 같은 지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입증한 연구자에게만 HCR을 준다. 작년에는 전 세계에서 단 6849명만이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은 어땠을까. 2022년 한국은 서울대와 KAIST, UNIST 같은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을 합쳐서 70명의 HCR 연구자를 배출했다. 20년 전 한국을 벤치마킹하러 왔던 칭화대 한 곳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이 총장은 이 차이가 세계 일류대학을 만들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부족했던 결과라고 진단했다. 이 총장은 대학에 투자하는 비중을 2%P(포인트)만 높여도 한국의 연구중심대학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발판이 생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투자만 늘린다고 해결될까. 연구 현장의 비효율은 하루이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연구중심대학들은 1970년대식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개도국 시절의 연구 환경과 문화가 50년이 지난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이걸 연구중심대학 1.0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선진국형인 연구중심대학 2.0으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한국보다 앞서가는 세계대학들이 어떤 제도적인 경쟁력을 가졌는지 살펴보고 이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과학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싱가포르, 홍콩 같은 대학들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들을 봐야 한다. 중국도 말할 것도 없다.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 연구중심대학들은 세계대학과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를 고쳐야 할까.
“연구자가 과제 관리하고, 연구 장비 관리하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연구지원체계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교수에게 과제 관리, 장비 관리를 맡긴 건 1970년대 KAIST가 시작할 때만 해도 대학본부에 돈이 없다보니 교수들에게 책임까지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과제의 규모나 연구 장비의 규모가 교수 한 명이 맡기에는 너무 커졌다. 이걸 대학본부가 맡는 연구지원체계를 만들고 교수나 연구자는 창의적인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유니스트는 주요 연구장비를 일원화해서 관리하는 연구지원본부(UCRF)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 연구자가 순수 연구에만 쓰는 시간이 미국과 비교해 적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연구자가 연구개발에 할애하는 비중은 전체 업무시간의 37.3%에 불과하다. 미국은 49.8%로 적지 않은 차이가 난다. 한국은 연구자가 과제 수주에만 전체 업무시간의 23%를 쓰고 있다. 이 총장은 “유니스트의 HCR급 젊은 연구자가 한 명이 40억원까지 장비를 들여오느라 몇 달 동안 연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하소연한 적도 있다”며 “미국이나 독일이었으면 어림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투자를 늘리고, 제도를 고치는 것 말고 또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
“더 많은 인재를 영입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한국은 해외 우수인력 유치를 위해 브레인풀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초빙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다. 국내 과학자 사기진작을 위한 국가과학자 제도는 수례자가 너무 적다. 국가과학자를 1000명 정도로 늘리고 5년마다 연구실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가한다면 효과가 엄청날 것이다. 대학이 더 많은 인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투자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간접비 징수 비율도 높여야 한다. 간접비 징수 비율을 높이며 정률제로 운영하되 연구직접비에 간접비를 추가하는 미국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대학에 더 투자하면 한국도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을 가질 수 있다. 대학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퍼스트 무버 역할을 기대하는 건 모순이다. 연구비를 분배할 때는 연구자를 위한 연구몰입환경을 얼마나 잘 갖췄는지도 평가해야 선순환 구조가 정착될 수 있다.”
-좋은 인재를 유치하는 게 중요하지만 유출을 막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러플린 전 KAIST 총장이 내게 스탠퍼드대 총장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뭔지 아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러플린 전 총장이 한 이야기가 하버드대가 스탠퍼드대 노벨상 수상 교수들을 빼내 가려고 하는 게 스탠퍼드대 총장들의 골칫거리라고 하더라. 인재 유출은 모든 대학의 고민이라는 말이다. 뺏기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뺏겼을 때 다시 뺏어올 만한 힘이 있어야 하고, 몇 명 빠져도 견딜만한 규모를 키우는 것이다. 카이스트 전기전자과는 교수가 90명이다. 1, 2명이 이직해도 신경쓰지 않는다. 교수가 10명인 조직은 핵심인재 1, 2명이 빠지면 휘청할 수밖에 없다. 유니스트는 지금 교수 TO가 340명인데, 400명을 넘겨야 안정권에 든다. 포스텍이 늘 칼텍을 벤치마킹한다고 하는데, 칼텍의 교수가 400명이다. 우리는 지방에 있다보니 늘 정주여건에서 아쉬움이 있다. 이런 부분을 보완하려고 영재학교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고, 어린이집 같은 보육 환경도 강화하고 있다.”
이 총장은 인재 유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지난해 독일 막스플랑크 기후과학연구소로 옮긴 강사라 교수를 언급했다. 강 교수와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어떤 조건으로 옮기는지 넌지시 물었더니 은퇴할 때까지의 연봉과 연구비, 지원인력 제공까지 보장받았다는 답을 들은 것이다. 독일은 가뜩이나 정년이 67세로 연장됐는데 막스플랑크연구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연구소장은 정년 자체를 없앴다. 이런 후한 조건으로 이직하는데 강 교수를 잡을 명분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총장은 두 시간에 가까운 인터뷰를 마치며 세계일류대학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만드는 건 국가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대학과 연구 수준이 아직도 개도국 모델을 따르고 있는데 이걸 탈피해서 세계적인 일류대학을 몇 개 만들자는 비전이 나와야 한다”며 “우리가 퍼스트 무버가 되지 못하는 건 지금까지는 이런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용훈 UNIST 총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 학사
서울대 전기공학과 석사
펜실베이니아대 전기공학과 박사
한국과학기술원 신기술창업지원단 단장(2001.06~2004.02)
한국과학기술원 공과대학 학장(2005.11~2008.05)
한국과학기술원 정보과학기술대학 학장(2008.06~2011.06)
한국과학기술원 ICC 부총장(2011.04~2013.06)
한국과학기술원 교학부총장(2011.07~2013.03)
울산과학기술원 총장(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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