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구함에서 발견된 핸드폰 14대…‘070’을 ‘010’으로 바꿔주는 보이스피싱 중계기였다[꾼들의 세계]
2022년 서울 영등포의 한 아파트 단지 배수구함에서 휴대폰 14대가 발견됐다. 수상한 휴대폰들의 주인은 A씨.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계기 관리책’이었다.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조직은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중국 등 해외에 콜센터를 둔다. 하지만 해외에 있는 콜센터는 문제가 있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이 국제전화나 인터넷 전화번호(070)로 걸려오는 전화를 의심하고 잘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해외에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는 국제전화나 인터넷 전화번호를 ‘010’으로 시작하는 국내전화번호로 바꿔주는 ‘중계기’를 사용한다. 그리고 중계기로 이용되는 통신장비나 휴대폰 단말기를 관리하는 사람을 ‘중계기 관리책’이라고 부른다.
A씨도 2022년 5월 “핸드폰을 관리해주면 매월 2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계기 관리책 역할을 했다. 그는 중계기로 이용되는 핸드폰 단말기 14대를 아파트 단지 내 배수구함 3곳에 나눠서 숨겨두고, 전원이 꺼지지 않도록 배터리를 관리했다.
보이스피싱이 ‘010’으로 전화하는 법…기술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보이스피싱 기술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과거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주로 심박스(SIM Box)라고 불리는 ‘발신번호 변작 중계기’로 국제전화번호를 ‘010’으로 바꿨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내에 있는 휴대폰 단말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핸드폰 단말기에 유심칩을 장착한 뒤 해외에 있는 태블릿을 연동시켜두고 ‘다른 기기에서도 전화·문자하기’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갤럭시 휴대폰의 CMC(Call&Message Continuity)나 애플 아이폰의 COD(Calls on Other Devices) 기능이다. CMC 기능으로 휴대폰과 태블릿을 연동시켜두면 태블릿으로 휴대폰을 조작하고, 휴대폰 번호로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다. LTE버전 스마트워치를 휴대폰과 연동시켜두면 스마트워치와 휴대폰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스마트워치로 휴대폰의 통신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최근 심박스에서 CMC·COD로 옮겨간 것은 3G 통신 기반의 심박스의 추적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김용대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는 “심박스는 3G 통신을 기반으로 하는데, 국내에서 3G 사용자가 줄고 3G 통신이 이용하는 주파수도 좁아지면서 단속이 비교적 쉬워졌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보이스피싱 전화 신고가 들어오면 통신사는 어느 기지국에서 발신된 전화인지 찾을 수 있다. 한 기지국이 반경 300~500m를 커버하기 때문에 그 반경 안에서 3G 전파를 탐지하면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심박스도 찾을 수 있다”며 “반면, LTE나 5G 통신을 이용하는 휴대폰 단말기를 중계기로 쓰면 그 기계를 찾아내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김 교수의 연구실은 경찰청 과제로 CMC 기능 등을 이용한 중계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중계기 관리책 모집 방법…고액 아르바이트? 투잡?
해외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주로 ‘재택 가능 아르바이트’나 ‘고액 부업’이라며 중계기 관리책을 모집했다. 국내 수사기관에 중계기 관리책이 경찰에 검거되더라도 보이스피싱 조직의 ‘몸통’을 잡기 어려운 이유다.
B씨는 인터넷에서 부업을 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연락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중계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핸드폰을 관리해주면 B씨에게 핸드폰 1대당 하루에 4000원을 주기로 했다. 연락은 텔레그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B씨는 보이스피싱 콜센터 운영시간에 맞춰 매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휴대폰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B씨는 중계기로 이용되는 휴대폰을 원룸과 고시텔에 두고 관리했지만, 단속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차에 휴대폰들을 싣고 고령과 대구 지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유심이 피해자의 신고로 정지되면 유심을 교체하는 것도 B씨의 역할이었다.
B씨가 중계기 관리책 역할을 한 것은 2022년 7월15일부터 18일까지 단 나흘이었다. 하지만, B씨가 관리한 휴대폰들은 수사기관과 가족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이용됐고, 나흘간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은 총 6072만원에 달했다. 부산지방법원은 B씨가 보이스피싱 등으로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는 점, 피해자들과 합의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해 2022년 9월21일 B씨에게 전기통신사업법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참고한 판결문: 서울남부지방법원 2023. 4. 5. 선고 2022고단4830 판결
부산지방법원 2022. 9. 21. 선고 2022고단2450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