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인류인가

최원형 기자 2024. 1.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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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위기 앞 원주민운동가의 가장 급진적 목소리
지구 뒤덮은 단 하나의 ‘인류’에 저항하는 소수자
모든 존재자 껴안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그래픽 장은영 soobin35@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
아이우통 크레나키 외 지음, 박이대승·박수경 옮김 l 오월의봄 l 1만5500원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인류’(humanity)라고 여긴다. 인류에 속한다는 것은 “대지 위에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오로지 하나뿐”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 ‘문명’이라고 불리는 그 방식은 지구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이성적인 자연물’인 인간을 대지(지구)로부터 분리하고, 인간이 아닌 것들(때론 인간까지도)을 ‘인격 없는 사물’이란 이유로 자원으로 삼는 것이다. 이 방식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야생의 어둠 속에 남겨진 ‘야만인’이었고, 인류는 전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여 이들을 인류라는 클럽에 가입시켰다. 그랬던 인류는 이제 거침없이 종말로 치닫고 있다. 인류가 더 이상 대지(지구)에 거주할 수 없는 파국을 부른 이 시대를 반성한다며 ‘인류세’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인류는 과연 종말을 피할 수 있을까? 브라질 남동부 도시강 유역 크레나키인의 땅에서 태어난 원주민운동가 아이우통 크레나키(69)는 종말을 피하거나 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늦추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는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강연 세 편을 모은 1부, 크레나키의 생각들에 대한 브라질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카스트루, 프랑스 철학자 장크리스토프 고다르, 한국 정치철학자 박이대승의 글이 담긴 2부, 원주민의 ‘역-인류학’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들이 담긴 3부로 이뤄진 책이다. 박이대승이 연구책임을 맡고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정기 국제 세미나 ‘탈식민적 인류학’의 활동이 이 책을 기획하는 토대가 됐다.

서구 인류학은 문명인의 눈으로 야생인을 탐구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이 탐구 대상으로 삼았던 존재들의 관점에서 서구 인류학을 거꾸로 바라보고 인류학을 비판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고, 이를 ‘역-인류학’이라 부른다. ‘역’(逆)은 “단순히 같은 세계 내에서 관점을 이동하거나 입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류’가 단 하나의 핵심으로 삼았던 인간-비인간, 문화-자연 같은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존재자가 인격으로서 서로 관계 맺는 세계”(박이대승)다. 예컨대 크레나키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도시강 건너편에 타쿠크라키산이 있는데, 산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이른 아침 마을 중심에서 그 산을 바라보면, 사람들은 그날 날씨가 좋을지, 침착하게 있는 게 나을지 바로 알 수 있다. 산이 ‘오늘은 대화할 기분이 아니야’라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각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고, 다양한 유형의 존재자들이 다양한 사물들을 ‘같은’ 방식으로 본다고 여긴다.

브라질 원주민운동가 아이우통 크레나키. 네투 곤사우베스 제공
2015년 11월 브라질 남동부에서 광산에서 흘러나오는 오염 물질을 막고 있던 푼당 댐이 붕괴하는 사고로 온갖 유독물질이 도시강으로 흘러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독물질로 붉게 물든 강물이 대서양으로까지 빠져나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누리집 갈무리

크레나키는 “우리는 인류가 하나의 종이라는 생각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는 이처럼 산, 바다 등과 대화하는, 인류의 지배적인 삶의 형식에 따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것들을 모두 인격이 없는 자연(자원)으로 보고 뽑아먹는 단 한 가지 삶의 양식이 전세계를 뒤덮었고, “문명인의 방문을 받고 그로 인해 죽었던 인간 집단들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16세기에 이미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지금 종말을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인류”, 곧 ‘백인들’이며, “지금의 세계를 정의하는 것이 바로 세계의 종말”(장크리스토프 고다르)이다.

이미 종말을 맞이한 원주민들은 지난 5세기 동안 자기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길 계속함으로써 이 ‘인류주의’에 저항해왔을 따름이다. 바로 여기에 세계의 종말을 ‘늦춘다’는 것의 의미가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인류의 방식이 아니라 삶 자체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또 다른 이야기를 항상 들려줄 수 있는 우리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 저항이다. 1980년대부터 원주민운동에 뛰어든 크레나키는 군사정권 종료 뒤인 1987년 브라질 의회 연단에 서서 원주민 관습에 따라 얼굴을 검은색으로 칠하며 원주민으로 살아갈 권리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동질화된 인간의 지위 대신 다른 인간의 존재를 드러냈으며”(박수경), 1988년 개정 헌법에 ‘원주민에 관한 절’(“원주민들의 사회 조직, 관습, 언어, 신념 및 전통, 그들이 전통적으로 점유한 땅에 대한 원래의 권리를 인정한다”)이 도입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원주민운동가인 아이우통 크레나키(왼쪽)와 야노마미 원주민 샤먼 다비 코페나와(오른쪽). 크리스치앙 브라가 제공
아이우통 크레나키 등이 1989년 조직한 원주민, 고무나무 채취자 등 밀림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합체 ‘밀림거주자동맹’의 모습. 밀림거주자동맹 누리집 갈무리
원주민운동가 아이우통 크레나키가 1987년 브라질 의회 연단에서 원주민 관습에 따라 얼굴을 검은색으로 칠하면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브라질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연설은 1988년 브라질 헌법에 ‘원주민에 관한 절’을 도입하는 중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유튜브 갈무리

크레나키의 말들을 ‘우리가 몰랐던 원주민의 지혜에 귀 기울여 임박한 종말을 피할 깨달음을 얻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지닌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형이 되고 말 것이다. ‘인류 자체가 종말’인 현실에서, 그저 ‘인류 클럽’ 회원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재조직하거나, ‘야생’의 공간을 보존하고 자연 자원의 착취를 규제하는 일 따위로 종말을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크레나키는 우리가 “생명과 삶의 다른 모든 형태를 고갈시키는 대가를 치를 때에만, 인간 공동체가 존속할 유일한 가능성이 생긴다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고 짚는다. 박이대승이 지적하듯,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온 “기존의 질서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수천 년간 이어져온 문명의 토대에 질문을 던질 역량”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산과 바다, 바위와 강과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지평이 아닌 우리 존재의 지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자연을 채굴 가능한 자원이 아닌, 깊은 의미를 나누는 ‘꿈의 장소’로 여길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인류’라는 관념에 함께 소속됨으로써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크레나키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 같지 않으며,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별자리와 같다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가 공간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서로 같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차이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을 늦추는 일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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