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어떤 비명은 오십년 만에 들려온다

한겨레 2024. 1.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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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네게브 사막 니림의 이스라엘 점령군 진지.

소설의 시선은 이스라엘군 소대장을 집요하게 쫓아간다.

이제 소설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소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대상은 가해자인 이스라엘군 소대장과 오늘날 팔레스타인 여성의 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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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의 다시 만난 여성

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l 강(2023)

1949년 8월 네게브 사막 니림의 이스라엘 점령군 진지. 소설의 시선은 이스라엘군 소대장을 집요하게 쫓아간다. 소대장은 사막을 수색하다 마주친 아랍인 무리에게 발포하고 홀로 살아남은 소녀를 진지로 데려온다. 그는 소녀가 풍기는 지독한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모래밭 한가운데서 소녀의 옷을 벗긴 후 이를 잡겠다고 머리에 휘발유를 뿌리고 벗은 몸에 호스로 물을 뿌려댄다. 소녀에게 병사들의 옷을 입힌 후 주방에서 일하게 하지만, 한나절도 안 되어 “병사 몇이 그녀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누구라도 “소녀에게 손을 댄다면 이것이(자신의 권총)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소대장 자신이 소녀를 막사로 데려와 입을 틀어막고 강간하고, 아침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소녀의 막사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결국 소대장은 소녀를 진지 밖으로 데려가 사살하고 땅에 묻는다. 소설의 1부가 진행되는 내내 소대장이 가장 신경 쓰는 대상은 피해자 소녀가 아니라 사막의 벌레에게 물린 뒤 염증과 통증이 심해지는 자신의 다리 피부다. 그런 그에겐 폭력적인 상황마다 끼어드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뿐, 온종일 울부짖고 비명을 질러대는 소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소설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화자는 1949년 살해된 아랍인 소녀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고 소녀의 사망일과 자신의 생일이 같다는 우연에 괴로워한다.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성격 때문이다. 아직도 옆 건물에서 총격이 벌어져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청년 셋이 살해되고, 그 폭격으로 자신의 사무실 유리창이 깨져 나가는 현실에서 수십 년 전 한 소녀의 죽음은 정말로 사소한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폭격과 강간과 살해가 흔한 현실이라도 화자는 자신이 태어난 날 살해당한 이름 모를 소녀에 관해 더 알아보고 싶다. 그러려면 현장에 가야 하고, 현장에 가려면 경계를 넘어야 한다. 결국 화자는 동료의 신분증을 빌리고, 다른 동료의 신용카드로 차를 빌려 현장으로 향하는데, 몇 시간 만에 그가 넘은 경계는 군사적 경계선, 지리적 경계선, 물리적 경계선, 심리적 경계선, 정신적 경계선으로 중첩된다. 이렇게 어렵사리 당도한 현장은 여전히 휘발유 냄새가 풍기고 개가 짖어대는데, 그 냄새와 소리는 마치 1949년의 것이 고여 있었던 것만 같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을 다 읽어도 우리는 과거의 아랍인 소녀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그런 걸 말하려고 소설을 쓴 것 같지 않다. 소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대상은 가해자인 이스라엘군 소대장과 오늘날 팔레스타인 여성의 내면이다. 전자의 내면은 흔들림이 없고 초연한 반면 후자의 내면은 자꾸 떨고 위축된다. 전자의 피부는 감염으로 곪아가고 후자의 피부는 공포가 거미처럼 기어 다니며 마비시킨다. 그러나 기꺼이 경계를 넘어 위험의 한가운데로 향하는 사람은 공포에 떠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주변에는 똑같이 휘발유 냄새가 풍기고 개가 짖어댔지만, 전자가 듣지 못했던 (혹은 듣지 않았던) 소녀의 비명이 50년의 시간을 통과해 지금 이 여성에게는 똑똑히 들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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